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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40대에 시작하면 정말 4부가 되나요?

(속설이 진실이 되려면)

by 하늘

"하늘 씨, 40대에 시작하면 4부가 될 수 있다잖아. 희망을 가져.”

관장님이 용기 내라고 하는 말인데 왜 공허하게 들리지?


"10대에 시작하면 1부까지 갈 수 있고

20대에 시작하면 2부까지 갈 수 있고

30대에 시작하면 3부까지 갈 수 있고

40대에 시작하면 4부까지 갈 수 있다."

라는 탁구계의 속설이 있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한가? 여기에는 무시무시한 단서조항이 하나 붙어 있다. 겁나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겁나 열심히? 얼마큼이 ‘겁나 열심히’일까? ‘겁나 열심히’는 다양하게 해석된다. 탁구장에서 살거나 레슨을 오래 혹은 많이 받거나.


예전 나를 가르쳤던 코치는 정말 20대에 시작해 3년 만에 지역 1부가 되었다. 그의 부수 승급은 이 지역 탁구계의 전설이 되었다. 속설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는 거의 3년을 탁구장에서 살았다. 퇴근 후 7시부터 밤 12시까지 탁구를 쳤고 주말에는 코치와 먹고 자면서 훈련하고 연습했다. 매일 6시간 이상 탁구를 쳤단다. 월급은 전부 탁구 레슨비와 코치와 동고동락하는 비용으로 지출했다고. 탁구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지금은 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탁구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이만큼이 ‘겁나 열심히’인가?


나와 나이가 같은 5부 남자회원은 40에 탁구를 시작했다. 그 역시 퇴근 후, 주말 내내 탁구장에서 살았다. 그의 목표는 3부였다. 3부 정도는 되어야 1,2부와 게임을 재미있게 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10년 동안 레슨을 쉬지 않고 받고 있다. 레슨을 거의 매일 받다시피 한 적도 있단다. 한 코치에게만이 아니라 여러 코치에게 동시에 받기도 했단다. 이만큼이 ‘겁나 열심히’인가? 이렇게 '겁나 열심히' 하는데도 아직 4부가 아니다.


그럼 46세에 탁구라켓을 잡은 난 4부까지 갈 수 있을까? “겁나 열심히”라는 조건에 부합하는지 한 번 따져 보자. 탁구장에서 살다시피 하나? 그럴 리가. 평일에는 하루 평균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 주말에는 3시간 정도 탁구를 친다. 거의 매일 출근하지만 살지는 않는다.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매일 공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공부의 양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처럼. 탁구장에서 산다는 조건은 탈락. 그럼 레슨을 많이 받는가? 주 2회에서 3회 정도를 4년째 받고 있다. 오랜 기간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매일 받는 것도 아니니 레슨을 오랜 기간 받았거나 많은 시간을 받은 게 아니니 이 조건도 탈락. 결론은 두 가지 조건에서 한참이나 미달이다.


속설이 진실이 되려면 '겁나 열심히'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관장님 말이 뜬구름 잡는 말로 들렸던 것 아닐까? 이렇게 탁구를 쳐서는 절대 4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겁나 열심히’라는 말의 무게를 알고 있기에.


그러면 '겁나 열심히' 한 번 해 볼 거냐고? 아니 그렇게는 못한다. 따박따박 매일 출근하는 건 1등 할 자신이 있지만 탁구장에서 오랜 시간 살 자신은 없다. 레슨 시간도 더 늘렸다간 체력이 바닥나 탁구를 접을 수도 있다. 주위에 체력이 고갈되어 그만둔 지인들이 꽤 된다. 속설이 진실이 되게 하는 건 예전 코치만으로도 충분하다. '겁나 열심히'라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생활체육인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1000명 중에 1명, 10000명 중에 1명, 100000만 명 중 1명? 그러니 전설이 되었겠지. 40대에 시작한다고 해도 4부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10년 동안 한 부수도 승급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속설과 현실의 괴리는 이렇듯 크다.


이러한 현실에서 "40대에 시작했으니 4부까지 갈 수 있다."는 말은 "40대에 시작했는데 왜 아직 8부야?"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어느 날 한 회원이 구력을 물어 4년 조금 지났다고 했더니 "4년 쳤는데 왜 아직 8부야?"라고 물었다. 그러게. 4년이나 쳤는데 난 왜 아직 8부일까? 열심히 안 해서? 갑자기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의 말이 떠올랐다.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열심히 하지 않은 걸로 하겠다."라는. 모든 게 자신의 책임인 양 주늑 들며 말했던 장그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빙의되어 "그러게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부족한가 보네요."라고 대꾸했다. 말하면서도 씁쓸했다. 4년의 시간이 평가절하되고 있었다. '더 열심히 했어야지, 더 열심히 살았어야지' 비난하는 것 같았다.


승급하진 않았어도 내 탁구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다. 이렇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달리는 내 탁구가 난 좋다. 마음에 든다. 그러니 "40대에 시작하면 4부가 될 수 있다"라는 말에 잡혀 먹히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안 되었다고 주눅 들지 말아야겠다. 그 말에 부응하지 못하면 그 말은 당장 나를 패배자로 만든다. 내가 왜 패배자인가? 이렇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탁구를 치고 있는데. 속설은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말인 걸로. 나와는 무관한 말인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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