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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의 세계에서 승부를 내지 않는다는 건

by 하늘

“매일 하는 연습 지겹지도 않냐? 보는 사람이 다 토가 나올 지경이야”

“게임 안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야”

“게임 안 하려면 탁구는 왜 쳐?”

“게임을 해야 실력이 늘지”


그렇다. 나는 이른바 탁구장에서 문제적 인간이다. 탁구는 승패를 가리는 운동인데 승부 내는 걸 거부하고 있다. 작가 지망생인 난 종일 글쓰기와 필사, 책 읽기 등에 매달린다. 그러기에 머릿속은 항상 과부하 상태다. 저녁 식사 후 머릿속을 탈탈 털어내기 위해 탁구장으로 향한다. 또다시 머리를 써야 하는 게임은 하고 싶지 않다. 승패 후 일희일비하는 감정 소모도 싫다. 아무 생각 없이 몸만 쓰고 싶다.


시스템 연습에서 답을 찾았다. 파트너와 연습 시스템을 짜고 연습에 몰두한다. 포핸드, 백핸드, 돌아서 상대편의 백 쪽에 스매싱, 상대편의 포핸드 쪽에 스매싱 등 해야 할 연습은 무궁무진하다. 게임과 비슷한 3구 연습도 병행한다. 똑같아 보이지만 어제의 연습과 오늘의 연습은 다르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감각이 있다. 연습하는 걸 좋아하다 못해 연습에 집착한다. 연습을 통해 체력의 한계치까지 나를 밀어붙이다 보면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말끔히 비워지는 것 같다. 유난히 머리를 많이 썼다 싶은 날은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갈 때까지 탁구장을 뛰어다닌다. 그러다 보면 내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오는데 이때의 기분이란! ‘이 맛에 운동하는 거군' 그러면서 알았다. 나란 인간은 정해진 시스템을 좋아하고 일정한 운동량이 충족되어야 만족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타고난 성향도 한몫한다. 어떤 일이든 누군가와 경쟁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가 정한 기준이나 목표를 달성해 가면서 느끼는 만족감이 중요한 사람이다. 어제보다 조금씩 나아지는 오늘의 내가 기준점이다. 이런 기질의 내게 승부를 내야 하는 탁구는 굉장히 이질적인 운동이다. ‘말아톤을 할 걸 그랬나?’ 후회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탁구가 기질에 꼭 맞는 부분이 하나 있다. 반복하는 걸 지루해하지 않는 성격이다. 무언가를 체득하는 데 있어서 느리기도 하거니와 감각이 없어서라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기타를 배울 때도 그랬다. 음악적 감각이 없으니 다른 사람보다 긴 시간 반복연습을 통해 진도를 따라갈 수 있었다. 반복이 일상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상적인 구절들을 필사한 후, 그 부분들을 반복해서 읽고 이를 몸에 체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반복이 삶으로 자리 잡았다.


탁구 기술 역시 무한 반복을 통해서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포핸드 드라이브를 제대로 구사하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평균 최소 3년에서 길게는 5년까지 걸린다고 한다. 반복을 통해 기술들을 하나씩 발전시켜 가는 과정이 성향에 맞는다. 탁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수많은 반복을 통해 몸에 각인되었던 것이 무의식적으로 나왔을 때다. 이때의 쾌감이란! 그런데 이 순간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될 듯, 말 듯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연습에 집착할 수밖에. 어제는 그 기술이 잘 되었다는 감각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감각이라는 그분께서 몸에 왕림하셨다가, 가셨다를 반복한다. 반복해도 안 되면 ‘연습 부족이군’이라는 단순한 대답으로 나를 위로한다. 그만큼 연습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겠지만 연습을 통해 내 탁구가 단단해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어제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 이거면 충분하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탁구를 치고 있다. 그럼 이런 나를 바라보는 탁구장 사람들의 시선은? “게임을 하지 않겠다고?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라는 눈빛이 대부분이다. 어느 상위 부수는 자신이 하위 부수와 게임을 해 주겠다는데 하위 부수가 거절한다며 괘씸해하기도 했다. 재수 없겠지. 초보인 주제에 지가 뭐라고. 죄송스럽다. 하지만 그와 게임을 시작하면 다른 회원과도 게임을 해야 하기에 따가운 눈총을 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처음이 어렵지 먹을 만큼의 욕을 먹고 나니 "원래 재는 저렇게 연습만 하는 애야 "라는 콘셉트를 가질 수 있었다. 선택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가 없이 주어지는 건 없다. 이렇게 “내놓은 아이”이자 “포기한 아이”가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게임을 안 하면 어떡하냐?"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대가는 매번 치러야 한다. “그러게요. 게임을 안 하는 게 문제예요. 알고 있는데 잘 안 되네요.” 빛의 속도로 인정한다. 그리곤 냅다 연습하러 나간다. 모델 한혜진의 말이 떠오른다.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유일하게 내 몸만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같다.”라고. 그래. 인생사 뜻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데 탁구만이라도 내 기질대로 쳐 보자. 나 하나쯤 이렇게 친다고 탁구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게임을 안 하는 건 아니다. 주말에는 게임을 한다. 평일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았더니 내 생각만 하고 사나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아서이다. "주말에는 게임도 한답니다."라는 궁색한 변명을 하려는 속셈도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있으니 끝까지 내 고집만 부릴 순 없다. 주말에도 연습만 하고 싶긴 하다. 정말 못 말리는 인간이다. 하지만 나란 인간이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는 걸 어쩌겠는가? 그러니 나만의 방식으로 승부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나도 안다. 이러한 성향임에도 언젠가는 게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언젠간 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내 기질대로 탁구를 치고 싶을 뿐이다. 어느 순간 게임한다고 미쳐 날뛸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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