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안 먹어요.”
젊은 남자회원이 피자를 먹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다. 피자를 먹자고 제안한 나이가 있는 회원은 “그래도 먹고 가.” 라며 한 번 더 권한다. 이에 젊은 회원은 거듭 거절한다. 내가 다니는 탁구장에는 60이 넘은 회원들과 30-40대와 나처럼 중간에 낀 50대도 있다. 연령이 다양하다 보니 종종 부딪힐 때가 있다.
일반화할 순 없지만 나이가 있는 회원분들은 연습도 하지만 주로 게임을 하고 단식도 하고 복식도 하며 친목을 다진다. 여기에 음식이 빠질 수 없다. 집에서 소소하게 준비해 온 간식을 나눠먹거나 거하게 음식을 해 먹기도 한다. 관장님 역시 “행복이 별 건가? 이게 바로 사람 사는 모습이지.”라며 격하게 동조한다. 관장님 또한 50대 후반이다.
이에 반해 비교적 나이가 젊은 회원들은 친목보다는 실력향상이 우선이다. 탁구 외적인 것보다는 탁구라는 본질에 충실한 편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간식을 먹자.”라고 제안하는 나이가 있는 회원에게 젊은 회원은 “먹지 않겠다.”라는 자신의 노선을 굳건히 지킨다. 다들 각자의 입장이 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직장을 마치고 구장에 들어선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배달된 음식으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고 음식 냄새가 탁구장에 진동했기 때문이다. 운동하기 위해 부랴부랴 왔는데 운동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퇴근 후 운동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그에게 탁구장은 운동하는 곳이지 음식을 먹는 곳이 아니다. 어수선하고 왁자지껄한 상황에서도 그는 또래 젊은 회원과 운동을 시작한다. 휴식 테이블에서는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도는데 탁구대에서는 탁구공이 연신 네트를 가르며 왔다 갔다 한다. 관장님은 젊은 회원들을 흐뭇한 눈길로 보며 “이 와중에 저리 열심히 탁구를 치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라며 감탄해마지 않는다. 관장님은 정녕 모르신단 말인가? 그들은 단지 본질에 충실한 젊은 세대라는 걸.
이러한 생각은 30대 회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배가 부르다는 이유로 어른들이 건네는 간식을 정중히 거절한다. 너무나 예의 바른 거절이라 ‘그도 탁구장에서 음식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구나!’ 알게 된 다음부턴 굳이 권하지 않는다. 강요하지 않는다. 그 역시 탁구장은 운동을 하는 곳이지 음식을 먹는 곳이 아니다. 이해를 하는데도 가끔은 ‘음식을 먹으면서 친해진다는데.’라며 이런 거절이 정이 가지 않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본인들 스스로도 피해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요즘 세대라는 생각에 그러려니 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이 50으로 60대와 30-40대의 중간에 낀 세대다. 젊은 세대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그럼 나는? 나는 낀 세대답게 적당한 처세술을 구사한다. 사실 성향은 젊은 세대에 가깝다. 친목보다는 탁구 기술 향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쪽에 속한다. 하지만 매주 간식을 먹자고 제안하는 회원이 어른이신지라 매번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젊은 사람들은 구장에서 음식 먹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일주일에 한 번은 무리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먹는 건 어떠신가요?” 절충안을 제안한다. 그럼에도 의견이 모아져 음식을 시키면 대체로 따르는 편이다. 차마 거절은 못하고 중간에 낀 세대로서의 본분에 충실한다. 그러나 음식이 왔다고 연습을 그만두고 오라고 할 때는 하고 있는 연습을 마친 뒤에야 들어온다. 내게도 음식보다는 탁구가 우선순위다.
젊은 회원들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는 가치를 주입받고 자란 세대이기에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공동체의 행복보다는 개인의 행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윗세대는 개인주의가 집단의 화합을 저해한다고 배웠고 개인의 행복보다 공동체의 행복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이렇듯 서로 다른 성향의 세대가 함께 탁구를 친다. 세대 간의 갈등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작은 공간에서도 그것은 존재한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젊은 회원들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친해질래야 친해질 수 없는 벽을 느끼기도 한다. 어제는 분명 친한 것 같았는데 오늘은 왠지 쎄하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본인도 피해받고 싶어 하지 않는 세대라는 걸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칫 “요즘 것들은 싸가지가 없다.”라는 오해를 해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다. 실제로 나이가 있는 한 회원은 “개는 예의가 없어. 정이 안 가.”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심지어 탁구 치는 것도 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반대로 젊은 회원들 입장에서 보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어른일까?
내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나 또한 무슨 마법의 주문처럼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라.”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이런 아이들이 이제는 훌쩍 커서 나같이 낀 세대 또는 윗 세대들과 부딪히며 살아간다. 가치관이 다르니 부딪힐 수밖에 없다. 당연히 세대 간의 갈등이 생긴다. 꼰대라는 부정적인 호칭도 생겼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어른이 있는가 하면 “나 때는 이랬는데.”를 말하며 라때를 줄기차게 반복하는 어른도 있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용을 쓰지만 쉽지만은 않다. 어느 날은 지극히 꼰대였다가 어느 날은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의 젊은 세대처럼 행동한다. 공동체를 위해 개별성이나 특이성을 무시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와 개별성을 마음껏 뽐내는 시대라고 한다. 나 역시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면서도 몸에 밴 공동체 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전 교육의 잔재가 몸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다.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 행동하다가도 “이래도 되나?” “이래도 될까?” “너무 이기적인 거 아냐?” 죄책감이 수시로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