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0. 핌플 전형에 대하여

by 하늘

“핌플 러버를 달아. 지금 치는 거 보면 두 부수 정도 승급은 문제없을 거야.” 한 회원이 내게 건넨 말이다. 이렇듯 핌플 러버 전형을 선택하라고 권유하는 회원들이 가끔 있다. 그러나 내 답은 거의 비슷하다. “잘 치지 못하지만 민 러버 전형으로 계속 치고 싶어요. 민 러버로 치는 게 재미있어요.”


예전의 난 거의 수비형에 가까웠다. “수비 말고 본인이 쳐서 점수를 내야 한다.”는 관장님의 지속되는 세뇌에 물들었는지 탁구 스타일이 공격형에서 수비형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공격을 해서 점수를 딸 때의 기분이란 수비를 해서 점수를 딸 때와는 또 사뭇 다르다. 한 방 공격이 먹히면 짜릿함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이때의 희열이란! ‘이 맛에 탁구 치는 거구만!’ 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공을 주으러 가는 상대를 따라가는 내 발걸음엔 이미 교만이 한가득이고 '하나 해냈다고!'라는 오만함은 얼굴표정에서부터 흘러넘치다 못해 주체를 하지 못한다. '이러면 안 돼. 겸손해지라고.' 이성이 황급히 소리치며 막아서지만 나도 모르게 자체 방출되는 오만방자함은 감추어지지 않는다. ‘상대에게 이런 우쭐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데.’ 마음을 추스르지만 상대도 이미 눈치챘으리라.


이렇듯 요즘 난 공격에 미쳐 있다. 무조건 공격해서 이기려고 한다. 수비만 하다가 공격의 맛을 한 번 알고 나니 거침이 없다. 그동안 못한 공격을 이번 참에 다 하고 말겠다는 의지의 발현인가? 총량의 법칙은 탁구에서도 예외가 없나 보다. 닥치고 공격, 닥공 스타일이 되었다. 이제야 ‘탁구다운 탁구를 치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 그럼 수비형일 때는 탁구다운 탁구가 아니었니? 사람이 이리도 간사하다. 이런 내게 수비형에 가까운 핌풀 전형이 되라고 하니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물론 핌풀을 잘 다루는 분들은 공격 또한 민 러버에 뒤지지 않지만 내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어찌 되었든 지금은 이질 러버를 달 마음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영영 안 달 거예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게 사람 마음이니.


“나는 진짜 이질 러버 단 사람들이랑 치기 싫어. 뭔가 공정하지 못하고 반칙 같아. ”라며 핌풀 전형을 대 놓고 싫어하는 회원도 있다. 민 러버 전형의 한 여자 회원은 “오픈 대회 나가 봐. 여기서 뽕, 저기서 뽕. 아주 뽕밭이야.”라는 말을 하며 “핌풀 안 단 걸 보니 엄청 잘 치나 봐요.”라는 말도 들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그만큼 상위부수 여자 회원들 대부분이 핌풀 전형이라는 이야기다. 또 다른 여자회원은 “상위부수로 갈수록 민 러버 전형의 여자회원은 드라이브를 구사하는 남자 회원과의 게임에서 밀린다. 한계가 있다. 하도 남자 회원들한테 지길래 이질 러버를 단 적이 있다. 근데 재미가 없더라. 공격하는 맛이 덜하더라. 그래서 다시 민 러버로 돌아왔다.”라며 자신의 히스토리를 말한다. 사실 상위부수 여자 회원들 중 민 러버 전형을 찾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그래서 상위부수인 여자 회원들이 하나둘씩 핌풀 전형으로 바꿀 때마다 마치 내 일인 양 안타깝다. 핌풀 전형을 싫어해서라기보다는 민러버 전형 롤모델들이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아쉬움 때문이다.


나 역시 탁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민 러버도 어려운데 핌풀 전형까지 상대해야 하니 탁구가 더 어렵다. 누가 만든 거냐? 전 세계적으로 핌풀 러버를 허용하지 않아서 핌풀 전형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라며 부정적인 시선으로 핌풀전형을 바라봤다. 탁구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다. 시간이 흘러 탁구라는 세계에 몸 담은 지 4년이 넘어가면서 핌풀 전형 역시 수비 전형, 공격 전형, 올라운드 전형, 펜 홀더 전형처럼 단지 하나의 전형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람도 이 사람 저 사람 그 사람이 있듯 말이다. 낯설기 때문에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핌풀 전형도 하나의 전형이라는 걸 받아들일 시간 말이다. 박민규의 <핑퐁>이라는 소설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자신의 라켓을 갖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의견을 갖게 된다는 것." 민 러버 라켓을 가지든 핌풀 라켓을 가지든 그것 역시 자신의 의견이리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세대 간의 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