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찍은 동영상 보셨어요?”
파트너와 시스템 연습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던 내게 한 회원이 묻는다.
“바빠서 아직 못 봤어요.” 진짜 바빴나? 바쁘다는 건 솔직히 핑계고 보고 싶지 않았다. 단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영상 보는 걸 최대한 미루기 위한 술책이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시간이 필요하다. 나름 잘 치고 있다고, 잘 연습해 오고 있다는 내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걸 인정할 시간이. 온전히 내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영상 속 나와 현실 속의 내가 얼마나 다를지 마주하는 게 무서웠다. 다르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에 더 주저했다. 그렇게 문제의 동영상은 내 핸드폰 속에, 찜찜한 내 마음속에 한참이나 밀봉되어 있어야 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보러 갔을 때 운 좋게 게임 전 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본 게임이 3시에 시작되었는데 선수들은 2시부터 몸을 풀고 때로는 코치와 때로는 같은 팀 동료와 시스템 연습을 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프로선수들의 연습장면이라 동영상을 촬영하느라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여자선수들이 연습하는 시스템을 보며 ‘파트너와 한 번 시도해 봐야지’ 의욕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신유빈의 코치는 그녀가 서비스를 하나 넣게 한 후 불규칙으로 공을 주면서 실전 게임에 대비토록 했다. '저 방법도 한 번 해 볼까?' 의욕이 넘치다 못해 활활 타올랐다. 그렇게 벤치마킹을 위한 동영상들이 핸드폰에 수북이 쌓여갔다. 그런 고급미가 철철 넘치는 세련미가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영상들을 촬영한 후 며칠 뒤 내가 연습하는 동영상을 찍었다. 그러니 내 동영상을 열어 볼 자신이 있겠는가? 괜히 눈만 높아져서는.
한참을 미적거리다 '이 정도 시간이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니?'라며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과연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장점이라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시스템 연습을 한다는 것뿐. 단점은 차고 넘쳤다. 돌아서 스매싱할 때에는 왜 그리 팔을 올리지 않고 스윙하는지, 백 푸시할 때는 왜 마지막 순간에 라켓을 잡아주지 않는지, 파트너 차례에 왜 대주지 않고 치는지 등등.
머리가 아파왔다. 매일 열심히 연습해 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영상 속 나는 내가 생각했던 나와는 확연히 달랐다. 헛바퀴를 돌리고 있으면서 마치 잘 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한 나 자신이 고스란히 보였다. 원래 좋은 영화는 불편하다는데 불편함을 넘어 착잡했다. 이럴 줄 알고 그리도 보기 싫었나 보다. “저처럼 동영상 한 번 찍어보세요.” 권하는 내게 “싫어. 다 알고 있는데 뭐.”라며 극구 사양하던 파트너는 이미 이런 기분이 들 거라는 걸 알고 있었나 보다. 그도 나처럼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을 수도. 아니 현실을 마주하기 싫었던 것일 수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영상 보고 고치면 되잖아? " 그렇다. 고치면 되지. 이성적으로는 당연히 그렇지만 감정적으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마치 내 탁구가 단점만 가득해 거기서부터 시작했다간 주눅이 들어 의욕이 사라지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결정적인 건 탁구를 치는 재미가 사라질 수도 있다. 단점만 고치기 위한 탁구를 누가 치고 싶겠는가? 동영상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지가 중요하다. 인생은 항상 뭔가를 보여주고 '그럼 너는 이런 경우 어떻게 받아들일 거니?'라며 선택을 요구한다. 이때에도 당연히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이라는 게 정말 간사하다. 한참을 단점이 흘러넘치는 영상에 풀이 죽어 있다가 '그럼에도 탁구를 쳐야지.'라는 생각에 장점을 찾아내려 눈을 부릅뜬다. 드디어 어렵게 하나를 찾아냈다. 돌아서 스매싱을 하는데 파트너가 원래 주어야 하는 백 쪽 자리가 아닌 화쪽에 공을 주어도 잘 쫓아가서 친다. 일명 다리가 된다는 말. 장점을 더 부각해야 '오늘도 잘 살고 있다'는 나름의 자부심을 가질 테니 좀 더 과장해 본다. '다리 하나는 정말 잘 움직이네.' 스스로를 세뇌시킨다.
내가 무슨 단점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갈 수 있는 불굴의 의지가 있는 인간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비난 하나 칭찬 하나에 이리 팔랑 저리 팔랑이는 심약한 인간이니 어쩔 수 없다. 다리 하나 잘 움직이는 걸로 나머지 단점들을 끌어안겠다고 마음먹었다. 장점 하나로 단점 열 개를 가려보리라. 그래야 오늘도 정해진 시간에 열심히 탁구를 칠 수 있을 테니까. 잘 치고 있다고 잘 살고 있다고 나름 생각하며 살 수 있으니까. 그러한 기만이 나를 속이는 일일지라도 나부터 살고 볼일이다.
그럼 단점들은 어찌할 거냐고? 바꾸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한 번에 다 바꿀 순 없다. 서서히 바꿀 것이다. 선수들도 그래서 매일 연습하는 거 아닐까? 단점을 줄이기 위해, 장점을 더 강화시키기 위해.
보고 싶지 않은 걸 마주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거면 됐다. 가끔은 기만도 하며 사는 인생이 정신건강에 이롭지 않을까? 비겁한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다. 단점 속에 파묻혀 우울한 나날들을 보내고 싶지 않다. 어쨌든 살아야지. 다시 탁구라켓을 들고 잘 치고 있다는 자부심 속에 살아야지.
그런데 만약 내 삶 전체를 동영상으로 찍는다면?
이러한 과정을 똑같이 반복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