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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탁구장에 이상한 여자(?)가 있어요.

by 하늘

저녁 8시.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가 탁구장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선다. 좌우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구장에 있는 모두에게 인사를 한 후에야 가방에서 라켓과 수건, 텀블러를 꺼낸다. 텀블러에 물을 가득 채운 후 탁구 로봇이 있는 기계실로 향한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기 시작하는데 폼이 예사롭지 않다. 손바닥이 바닥에 닿게 허리도 구부리고 깎지 낀 손을 허리가 꺾이도록 좌우로 흔들기도 한다. 양쪽 다리를 풀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무슨 의식을 치르듯 스트레칭을 한다.

스트레칭이 끝남과 동시에 로봇을 세팅한 후 백핸드를 시작으로 연습을 시작한다. 본인만의 시스템이 있는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로봇을 세팅하고 그에 따른 연습을 한 뒤 다음 연습으로 넘어가길 반복한다. 백 푸시, 백 드라이브, 포핸드 드라이브, 스매싱으로 순으로 진행되는 것 같다. 바로 옆에서는 관장님 레슨이 20분간 이루어지는데 한 사람의 레슨이 끝나도 그녀는 기계실을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녀의 마지막 연습은 대부분 스매싱으로 끝나는 것 같다. 화쪽에서 스매싱 코스 가르기와 백 쪽에서 돌아서 스매싱 가르기를 하고 나서야 기계실을 나온다. 땀범이 된 그녀는 여벌의 상의를 챙겨 탈의실로 들어가더니 새로운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다시 등장한다.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는 건가?


그녀는 “아이고 힘들다.”라는 신음 소리를 내며 의자에 몸을 부리며 휴식을 취한다. 그리곤 금새 핸드폰에 뭔가를 적기 시작한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자판을 두드린다. 레슨이 끝나도 뭔가를 적던데 습관인가 보다. 어느 날 한 회원이 뭘 그렇게 쓰냐고 물었더니 “제가 자꾸 까먹어서 뭘 연습해야 할지, 뭐가 부족한지 쓰고 있어요.” 라고 답한다. 이런! 글로 탁구를 배우는 모양이군. 메모도 하고 다른 회원들이 탁구 치는 모습도 쳐다보고 레슨장 쪽도 쳐다보며 한참을 쉬더니 파트너와 연습하러 나간다.


그녀의 파트너는 주 4일 정도 그녀와 연습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함께 연습한 지 3년이 넘어간다고 한다. 그와의 연습도 탁구 로봇처럼 시스템이 있는지 서로 번갈아 연습하는 데 사뭇 진지하다. 특히 그녀는 백 쪽에서 돌아서 스매싱할 때 끙끙거리는데 그 소리가 유난히 커 난감해한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라고 미안해하는 그녀에게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듣기 거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대회 나가면 그 소리 어쩔 거냐?꼭 고쳐야 한다 라고 말하는 회원도 있다. 관장님은 "선수들도 그런 소리를 낸다."라고 말하지만 선수들이 내는 소리와 그녀가 내는 소리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그녀도 그걸 아는지 노력은 하는 것 같으나 쉽게 고쳐지진 않는 것 같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매일 거의 같은 시스템을 연습하고 있단다. 같아 보이지만 조금씩은 다른 시스템을.

연습시스템이 진화하고 있어 연습하는 게 너무 재미있다는 그녀. 연습하지 않고 집에 가면 운동을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짜증이 난다는 그녀. 한 회원은 “매일 똑같은 것만 연습하는 거 지겹지도 않냐? 토 나오겠다.”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회원은 “그렇게 연습했으면 난 벌써 2 부수 올렸겠다” 빈정대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연습만 하고 게임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탁구라는 세계는 모름지기 승부를 내야 하는데 승부 내는 걸 거부하고 있다. “매일 보는 사람들하고 승부를 내고 싶지 않아요. 매일 보는 사람들하고 경쟁하면서 사는 거 성향에 맞지 않아요.” 라며 게임을 거부한다. 게임을 해보겠다고 하던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독특한 캐릭터다. 처음엔 그녀가 게임하지 않는 걸 두고 말들이 많았다. “연습만 할 거면 탁구는 뭐 하러 쳐?” “게임을 해야 실력이 늘지” 등등.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탁구를 친다. 파트너가 아닌 회원과 탁구를 칠 때는 상대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연습을 하던지 게임과 비슷한 3구 연습을 한다. 이제는 구장 회원들도 그러려니 한다. "원래 재는 연습만 하는 애야." 캐릭터가 만들어졌다. 부득이하게 게임을 할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게임을 하지만 대부분은 피한다.


그녀가 탁구를 치는 루틴은 단순하다. 기계실에서 로봇과 연습하거나 탁구대에서 누군가와 연습하거나. 연습할 사람이 없으면 서비스 연습을 하거나. 때로는 회원들이 가고 난 후 자습을 한다며 홀로 남거나. 어떻게든 본인 연습량을 채우려고 한다. 누가 그렇게 연습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연습으로 시작해서 연습으로 끝을 낸다. 연습에 중독되었나?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다. “집에 가서 맛있게 맥주 먹으려고 그래요. 빡세게 운동해야 맥주맛이 좋거든요.” 이 정도면 이상한 여자 맞 않나요?

그 이상한 여자? 바로 나다. 이 글을 빌어서 조금은 특이한 아니 어쩌면 많이 특이한 나를 인정해주는(?) 관장님과 회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성향대로 탁구를 칠 수 있게 해 주어서 감사하다. 그리고 미안하다. 다들 어쩔수 없이 그려려니 하겠지만 나 또한 회원들과 게임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부채의식이 언제나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으니 내 방식이 괜찮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 방식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다른 회원들에게 불편할 수도 있는 걸 안다. 누군가는 "알면서도 그런다고? 더 나쁜 거 아냐?"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변명지만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매번 집을 나설 때 ‘오늘은 기필코 게임을 하리라’ 마음먹고 탁구장에 출근한다. 하지만 그게 맘처럼 쉽지가 않다. 글은 연습에 매몰되어가고 있는 나를 이제는 게임의 세계로 들어설 때가 되지 않았는지 푸시하는 글이다. 글이 일상에 작은 균열을 내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썼다.


'봐. 너 좀 이상하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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