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 남의 아이만 빨리 크는 것 같았는데 졸업이라니! _ 이제 졸업식 시작
설마 떨어지겠어?
입맛은 없었지만, 점심은 먹기로 했다. 투명 우산을 쓰고 세상 느린 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 한식집으로 갔다. 비 오는 거리를 십 분이나 걸어야 했지만, 반찬도 다양하고 한 끼에 7,000원. 가격도 착하다. 오늘은 청주공고 특별전형 발표일 '설마 떨어지겠어?' 싶으면서도 '설마가 사람 잡나?' 싶기도 하고. 마음이 또 널을 뛰었다. 합격발표는 왜 맨날 오후에 나는 거야? 밥도 제대로 못먹게시리. 까슬거리는 밥알을 물과 함께 억지로 넘겼다.
"어머님. 담임입니다." 차악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주신 중3 담임 선생님. "아.. 네.. 혹시 떨어졌어요?" 무거운 목소리에 인사도 못한 채 여쭈었다. 특별전형(청주공고) 합격자 발표는 오후 세시인데, 두어 시간 일찍 전화를 주신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는 무겁게만 들렸다. "발표는 세시인데, 청주공고에서 미리 학교에 연락을 주었네요." 담임 선생님은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떨어졌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합격입니다!" 네에?? 선.생.님. 목소리를 너무 까.셔.서. 놀랐잖아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께 깐다는 표현이 예의에 어긋나는지 어긋나지 않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부터 튀어나왔다. 차분한 목소리와 시간차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고자 했던, 담임 선생님의 소소한 유머였으리라. 선생님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무거웠고, 저음의 목소리는 내게 무섭게만 들렸다. 불합격의 절망에서 합격의 기쁨으로! 담임 선생님의 소소한 유머는 통했고, 나는 선생님의 극적 반전이라는 연출에 맞게 정확히 반응했다.
통화를 마치고,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춤을 췄다. 2020년 11월 26일 오후 1시쯤 청주 율량동 한식집 앞에서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상기된 얼굴로 춤을 추던 미친년을 보셨다면 저일 겁니다. 흔들어 재꼈습니다. 오예~
남의 아이만 빨리 크는 줄 알았는데, 제 아이도 빨리 크네요. 고등학교 입학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이라니. 입학식은 코로나로 못 가서 기억에 없으니, 다시 졸업식으로 가볼까요?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 거야
함께했던 시간은 이젠 추억으로 남기고
서로 가야 할 길 찾아서 떠나야 해요
2023년 03월 29일(수) 청주공고 학부모 총회에서 감색(어두운 남색) 양복을 입고 겨자색 컨버스 하이탑을 신어 기억에 남았던 학부모 회장님은 오늘 졸업식에서도 틀을 깬 모습으로 단상에 오르셨다. 기타를 메고 축사 대신 015B의 '이젠 안녕'을 열창하신 학부모 회장님. 마지막까지 고생하셨습니다 :) 다만 회장님의 열창에도, 같이 부르자고 외쳤던 후렴구에서도 아이들은 조용히 앉아있기만 했다. 노래를 모르나?
이어 아이들이 제작한 동영상을 시청하였다. 7개 학과의 3학년 담임 선생님과 부담임 선생님들, 교장선생님까지 아이들의 졸업을 축하해 주셨고, 미래를 응원해 주셨다. 범진의 '인사'라는 잔잔한 노래가 동영상의 배경음악으로 깔려 졸업식장을 채웠다. 나도 인스타에서 간간히 듣던 노래라, 멜로디는 익숙했다. 흥얼거리는 몇몇 아이들. 아.. 세대 간의 간극이 노래에서도 나타나는구나.. 015B의 '이젠 안녕'은 학부모만 따라 불렀고, 범진의 '인사'는 아이들만 흥얼거렸다.
돌아서는 너를 보며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슬퍼하기엔 짧았던 나의 해는 저물어 갔네
지나치는 모진 기억이 바람 따라 흩어질 때면
아무 일도 없듯이 보내주려 해 아픈 맘이 남지 않도록
안녕 멀어지는 나의 하루야
빛나지 못한 나의 별들아
차마 아껴왔던 말 이제야
잘 지내 인사를 보낼 게
청주공업고등학교는 1946년 9월 20일 청주공업중학교로 개교하였다. 이후 1951년 '청주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76년 '청주기계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청주공업고등학교'로 2011년 교명을 변경하였다. 이제 보니, 1951년 교명으로 돌아온 거네. 회귀(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거나 돌아감) 한 거 고만?!
개교일부터 현재까지 38,802명의 학생이 졸업하였고, 오늘 286명의 아이들이 졸업 인원에 추가되었다. 학년별 7개 학과 14개 반, 특수학급 2 학급 포함 총 44 학급으로, 현재 학생수는 총 906명이다. 학교연혁에 이은 학생현황, 교직원 현황, 졸업생현황 등 학사보고는 계속되었다.
⚫ 취업 총 131명_ 공공기관 14명, 대기업 21명, 중소기업 96명
⚫ 진학 총 131명_ 4년제 대학 65명, 2년제 66명
⚫ 진로 미결정 24명_
_ 90분 동안 진행된 졸업식 단상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청소년에서 성인이 된 아이의 졸업식은 제게도 의미 있더라구요. 특성화고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엄마라는 이름이 내게 처음으로 주어진 것만큼이나 낯설었습니다. '특성화고 엄마'라는 이름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아이는 졸업을 했습니다. 뒤돌아서면 까먹는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졸업식만이라도 기억하자 싶어 쓰기 시작했는데 90줄, 900줄 점점 길어집니다. 9000줄까지는 안 갈 수도 있고, 그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9000줄이라는 어감이 좋아(뭔가 대단히 길어 보이기도 하고) 소제목으로 얹어봤습니다. [ form_ Arisa ]
_ 29살의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제일 이른 결혼이었습니다. 제가 갓 태어난 아이에게 젖을 물릴 때 친구들은 쇼핑을 했고, 아기띠를 앞에 메고 등에는 바리바리 짐을 넣은 백팩을 메고 집을 나설 때 친구들은 조막만한 핸드백 하나 두르고 외출을 했으며,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운동화를 구겨 신고 터벅터벅 다닐 때 친구들은 뾰족구두를 신고 또각거리며 다녔습니다.
_ 아이를 키우며 밤잠을 설치고, 해도 해도 티 안 나는 집안일을 하며 서서히 메말라갈 때 친구들은 활짝 피어올라 결혼을 했습니다. 친구들의 아이는 초등 고학년이 되었네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초등학교에 입학해 내년이면 중학교도 갑니다.
_ 서로 바빠 몇 년에 한 번씩 만나는데,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답니다. 남의 아이는 정말 빨리 크는 것 같고, 쉽게 크는 것만 같습니다. "내년이면 우리 아들 군대가" 친구들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남의 아이만 빨리 크는 것 같았는데, 내 아이도 빨리 크네요. 탈없이 잘 자라나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한없이 감사한 날입니다. 결코 쉽게 키우지 않았을 모든 엄마아빠(엄마들에게만 인사전할라 했는데, < 딸그림아빠글 > 작가님의 세상을 만나니 아빠들에게도 인사를 전하게 되네요)들에게도 인사 전합니다. 고생했어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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