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아빠의 아기 맞이 대청소 갈등

by 물밖의물고기


아내도 엄마도 모두 좋은 사람이지만,

중간에서 내가 지혜롭지 못하다면

내가 두 사람 모두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조리원에서 아내와 나는 꿀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조리원에 적응해서 삼시세끼, 간식대접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쉬고 있었고, 나는 여태껏 회사에서 겪은 스트레스에 비례하게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이것은 엄청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모든 시간이 내 자유 외출시간이었고, 기후동행카드로 여기저기 쏘다니고 싶은 곳을 마음껏 쏘다녔다. 서울에 여행온 일본인처럼 매일 미소를 머금고 서울 구석구석을 산책했다.(양심상 혼자서 근교/지방으로 놀러 갈 욕심은 내지 않았다.) 살면서 자연을 많이 보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지만, 이 시간만큼 파랗고 예쁜 하늘을 많이 본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프라하 카를교에서 바라보던 파란 하늘과 붉은 노을이 떠오르는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행복치사량이 초과할 대로 초과해 버려서 현실감각을 잃어버렸는지, 정작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다가 문제가 발생했다. '하루만 더 놀자, 하루만 더 미뤄도 괜찮아'라고 생각하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놀다 보니 어느덧 "집 대청소"를 시작해야 할 날짜가 지나버린 것이다. 아내는 늘 아기를 맞이하기 위해서 집 대청소를 하도록 내게 수없이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아내를 일시적으로 안심시키려고 근거 없이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했다. 물론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내에게는 시어머니인 우리 엄마와 함께 청소하면 된다는 비장의 카드였다. 어쩌면 믿는 구석이 있어서 미루고 미뤄도 미소를 머금고 산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청소는 아래와 같은 일들이었다. 냉장고 정리, 세탁기 청소, 세탁물 정리, 집구조 변경, 아기용품 세팅, 집 전체 청소 및 소독, 아기용품 당근 등등 글자로 쓰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하나 직접 하려면 손이 정말 많이 가는 작업들이었다. 물론 나의 비장의 카드, 엄마찬스는 미리 예약을 걸어둔 상태였다. 엄마와 함께라면 집청소 따위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마치 순조로울 것만 같던 계획이었는데, 작은 연기처럼 보이지 않는 갈등이 우리 집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바로 갈등의 원인은 얄미운 소통의 문제였다. 내가 아내에게 엄마가 집에 와서 같이 청소한다는 걸 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솔직한 심경으로는 아내 몰래 엄마와 청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아가서는 "그게 뭐가 문제야"라고 생각했다.(많은 아내들이 충격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만 유구무언이다.) 한편으로는 맨날 나 혼자서 대청소 잘할 수 있는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근거 없이 아내를 안심시켰는데, 이제 와서 다 놀다가 엄마랑 같이 청소한다고 하면 분명히 아내와 부딪힐게 충분히 예상되어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호르몬 때문에도 감정이 잘 조절되지 않을 텐데 괜히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시어머니에게 무방비한 집의 모습으로 보였다가 작은 말이라도 나오는 게 부담스럽고 조심스럽다는 걸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알고 있었다. 물론 우리 엄마는 그럴 사람이 아닌걸 나는 알지만, 아내의 입장에서는 시어머니가 당연히 어렵고 불편한 게 게 100번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꽤나 얄미운 사람이었다.


대청소 첫날, 순조로웠다. 엄마는 엄마였다. 엄마의 손길은 나보다 10배는 현명하고 지혜로웠다. 만약 내가 했으면 배출 쓰레기들에 딱지 붙어서 비용을 물었을게 뻔하다. 내가 빨래를 접으면 엉성한데, 엄마가 빨래를 접으면 킬각이었고, 내가 빨래하면 냄새가 안 사라지는 것들도 엄마는 세탁방법부터가 솜씨가 달랐다. 엄마의 빠른 손길과 집안일 진척도에 신이 나서 아내에게 완료된 상태들을 사진 찍어서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조리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싸한 것을 발견했다. 내가 신발장을 청소한 사진을 찍으면서 엄마 신발을 사진에 같이 담아서 아내에게 보낸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사람은 꾀를 부리게 된다. 49대 51의 확률로 연기자가 되거나, 석고대죄를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후자의 케이스를 선택했다.


아내에게 가서 솔직하게 말했다. 엄마랑 같이 집에 와서 청소하는걸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어떤 이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고 반응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그게 뭐 어때서라고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성향상으로는 미리 이야기하지 않은 것, 그리고 부모님이 아직은 어려운 상황임을 감안했을 때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내 잘못이었다. 그런데 역시 석고대죄는 51 대 49의 확률로 용서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나 같은 얍삽이들은 잘 알고 있다. 아내는 조금 핀잔을 주긴 했지만, 충분히 이해하고 남은 날들도 엄마와 같이 청소하는 걸 응원해 줬다. 그리고 주간 내내 엄마의 식사와 커피까지 주문해 주고, 감사의 표현도 넉넉히 했다.


솔직히 별거 아닌 일이었고, 귀엽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출산 대청소 사건이었다. 아들의 가정을 도와주고 싶은 엄마의 사랑, 남편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아내의 사랑, 그 두 사람의 사랑을 충분히 알면서도 입맛대로 취하려는 남편의 간사함. 이번 대청소 사건의 빌런은 결국 나였다. 같은 상황이더라도 충분히 더 나은 과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는데, 결국 이번에도 내가 중간에서 깔끔하지 못했던 것 같다.(난 스스로 오래전부터 중간역할을 잘 못하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 지혜가 필요하다.) 소련과 미국이 냉전으로 치닫지 않으려면 체제의 균형을 사전에 잘 조율해야 한다. 그러나 이 어려운 관계의 패권싸움이 언제 어떤 양상으로 시작될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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