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좋은 우리 둘
남자와 한 집에 삽니다. 사랑이라는 꾸밈말을 독차지하게 된 남자. 나만의 남자가 된 사람이자 이제부터는 나의 배우자로도 불리게 될 남자입니다. 그 남자와 한 집에서 삽니다. 결혼을 계기로 남자와 함께 살아보는 경험이 시작되었지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가 아닌 우리 둘의 집. 따로 살아온 시간이 길었던 만큼 각자의 가치관부터 사소한 생활 습관도 다르기에 어떤 부분을 맞춰 나가야 할지 아직은 잘 모릅니다. 가족의 일원이 된 우리가 되었지만, 일상생활의 기본이 될 집안일 분담을 사전에 정해둬야 하는 것인지. 출근 전 그리고 퇴근 후 식사준비는 누가 할 건인지도 정해진 바 없습니다.
얼마 전 함께 쇼핑하며 새로 사 온 유리 포트에 홍차를 우려 봅니다. 투명한 붉은색이 마시기에 적합해질 무렵 식탁에 마주 앉은 여자와 남자. 우리의 이야기, 앞으로의 공동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습니다. 할 말 있어 보이는 여자가 먼저 대화의 물꼬를 터 봅니다. 사랑 한가득 담아 부릅니다. '자기야. 우리 집안일이랑 서로에게 바라는 점, 이것만은 지켜주길 바라는 것 있으면 얘기해 볼까?' 하고요.
즐겨마시지 않는 홍차를 따라주는 대로 후루룩 한모금마시다 두 눈이 살짝 커집니다. '무슨? 바라는 거? 그런 거 없는데?'라며 답하는 남자. 그렇게 대답하리라 미리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선 질문은 대화의 시작에서 중요하기에 했지 말입니다.
"그래? 없구나. 난 있는데. 자기도 듣다가 생각나는 거 있으면 얘기해 줘. 나는 몇 가지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같이 사는 건데 그래도 나름의 규칙이랄까. 정해두면 좋겠다 싶더라고. 가령 양말은 벗으면 바로 세탁기에 넣는다, 라든가. 세탁하고 빨래는 내가 할 테니 분리수거 특히 음식물쓰레기는 자기가 담당했으면 좋겠고... 괜찮을까? 음식은 아마도 내가 많이 할 테니깐...
그리고 아침은 최대한 같이 일어나고 아침도 간단히 먹고 출근하자. 아침준비는 출근시간까지 여유 있는 내가 해 줄 수 있도록 할게. 그리고 저녁은 먼저 들어온 사람이 준비하기로 하고. 어때?"
"좋아."
"그리고 또, 청소는 주말에 하자. 같이. 아 욕실은 세면대 이용하고 한번 물로 휙 청소하기로 하자. 한주마다 청소 번갈아 하고. 어때?"
"세면대 청소를 매일해?"
"가능하면 그렇게 하면 좋겠어. 욕실이 깨끗하면 기분 좋아질걸?"
".... 알겠어."
웃으며 알겠다 답하는데 가만 보니 '아니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하는 표정도 살짝 엿보입니다. 할 말 끝낸 여자는 살짝 식은 홍차를 입에 갖다 댑니다. 그윽한 향이 그대로인 것에 만족하며 한 모금 마셔봅니다. 이어서 두 모금째 마시려는 순간, 남자가 입을 뗍니다.
"청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할게. 퇴근하고 집에서 밥 먹는 거 좋다. 그렇지?"
어딘가 일방적이기도 한 우리의 집안일 대화는 10분도 채 안되어서 화기애애하게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 신랑의 인상 깊은 한마디의 여운이 생각보다 길게 남았습니다. 앞뒤로 무언가 더 부연설명과도 같은 이야기를 한 듯한데 기억나는 건 이것뿐입니다.
"시골에 세 달에 한 번쯤은 가면 좋을 거 같아. 그리고 전화안부는 일주일에 한 번은 하고."
"....... 음. (침묵)"
답해야 하는 차례임에도 입을 뗄 수 없습니다.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약간의 텀을 두며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1초당 24개의 프레임으로 구성된다는 영화필름 조각. 순간적으로 뇌를 활성화시켰고 집중력을 최대한 높인 후 대답을 찾아냈습니다.
전화? 사실 어제도 퇴근하면서 했었는데 몰랐구나? 전화안부는 걱정 마. 자주 하도록 할게, 날짜를 정해서 하는 건 자연스럽지 않아서 말이야. 그리고 시골에 가는 횟수는, 명절 더해서 분기마다 갔으면 하는 거야? 생신까지 더하면 충분히 그렇게 되겠다. 가급적 시간 내서 가도록 하자. 세 달에 한번... 시간 내서 가도록 해보자.
멀리 시골에 계시는 시부모님 댁 방문에 대해서는 약간의 대화가 조금 더 오갔지만 그러자, 그래보자. 라며 일단락을 했습니다. 지금에야 말이지만, 솔직히 그땐 깜짝 놀랐거든요. 부모님 챙김을 갑자기 나한테 맡기는 건가? 왜? 왜 나한테?라는 생각 때문에요. 자식들이 셋인데 내가 왜 우리 엄마에게도 안 하는 안부전화며 방문을 주기적으로 해야 하지?라고요. 그런데 대화의 초반에 하고픈 말, 서로에게 바라는 것 있으면 각자 말해보자. 했던 게 떠올랐습니다.
편하고 자유롭게 말하라, 하며 생각나거든 뭐든 얘기하라 했건만, 정말로 그렇게 했다 해서 날 선 대립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전혀 없었지요. 상대의 생각을 맞다, 틀리다의 이분법으로 답하는 건 철없다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을 같이하는 일상을 선택하였기에 그 상대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존중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말입니다. 나와 의견이 다르고, 무리한 요구라 생각 들더라도 말이죠.
왜 그래야 하는데?라는 뾰족한 생각이 들거든 최대한 빠르게 질문을 바꿔보려 해요. 그렇게 생각했어?라고 먼저 대꾸하고, 말을 하면서는 감정은 뒤로 보내고 이성의 생각을 앞장세우려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이 남자를 언제까지고 끝없이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남녀 간의 사랑이 끝없는 우주와 같다 하던데, 이렇게 넓혀가는 건가 싶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두 가지 화학 물질이 접촉하는 것과 같다. 어떤 반응이 일어나면 둘 다 완전히 바뀌게 된다. 칼 융의 사랑에 관한 글귀를 온전히 납득해 봅니다.
우리 둘만의 공간인 이곳에서 각자의 시간을 따로 또 같이 공유하며 지내려고 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이좋은 사랑 가득한 부부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