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음에

by 김혜진




평일 저녁 7시 30분 2호선 잠실역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는 길목. 그 곳에는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고 한쪽 벽에 기대어 즐겨보는 웹소설을 읽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철이 들어오면 고개 들어 바라도 봅니다. 퇴근시간 전철 안에서 까만 머리 회사원들이 끝없이 몰려나옵니다. 그중 유난스레 또각또각 특유의 리듬을 타며 그를 향해 걸어오는 여자가 있네요. 서로를 알아보고 더 없을 밝은 표정이 되어 가볍게 허그한 후 손 맞잡고 걷습니다.



그저 집으로 가는 길일뿐인데도 하루동안 뭉쳐진 고단함이 훌훌 날아갑니다.



기다린 시간이 단지 십 분이었을지 오분이었을지 아니면 단 일분이었다 한들. 온전히 나를 위해서 누군가의 기다림의 대상이란 것에 벅찬 기분마저 듭니다.



이십 대 시절이 떠오릅니다. 동경 한복판에 위치한 대학을 다니며,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한 아르바이트에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전철역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내내 힘든 몸보다도 외로움이 앞섰습니다. 백 엔 넘짓 하던 버스비를 아끼려 삼십여 분을 걸어 걸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둡던 집을 밝히자마자 몰려오는 혼자라는 현실과 밀려오는 허함은 늦은 밤 쏟아 내리는 잠으로 달랬지요. 철저한 외로움을 몸소 겪은 지난 날들 그리고 지금. 그 시간의 흐름이 살갗에 와닿습니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느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듣게 한 장본인이자 내 외로움을 단번에 앗아간 사람. 연애 시절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결혼 후의 일상생활이 시작되고 어느덧 일 년이 지나갑니다. 결혼하면 드러난다는 성격차이, 가치관 차이로 이해관계가 흐트러질 수도 있다지만 이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없지 말입니다.



연애하며 그리고 지금껏 한 번의 언쟁도 다툼도 없음을 얘기하면, 누군가는 말합니다. 아직 신혼이라 그런다, 더 살아봐야 안다. 안 다툴 거 같지만 원래 부부들은 다 싸우고 다투고 그런 거라고. 애 봐서 사는 거라고. 살아보면 어쩔 수 없더라고, 더 살아보면 싸울 수밖에 없다고요.



미래를 예견하며 아직 펼쳐지지 않은 현실 너머에 살고 싶지는 않아서인지, 그다지 마음에 새겨지는 조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글쎄요. 삼 년 오 년 혹은 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다 보면 예기치 않던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고 혹은 여전히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어찌 되었거나, 어제에 이어 오늘도 잠실역 환승 길목에는 퇴근하는 아내를 기다리는 이미 퇴근 한 남자가 있습니다.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음에 그 옛날 빛바랜 혼자라는 외로움마저 귀하게 여겨지는 저녁입니다.




화요일 연재
이전 03화시간을 넘어 공간을 공유하는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