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쓸모에 대하여

뒤늦은 복수

by 하늘샘


복수였다. 나의 복수. 다시금 곱씹어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나의 복수였다.

저들에 대한 복수. 당신들처럼 살지 않겠다. 당신들과 다른 삶을 살 것이다.

온 생애를 걸어 다짐했던 맹세이다.

9살짜리의 거창한 맹세였다.

그 맹세를 지금까지 지키며 살 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마음이 자라지 못한 아이였다.



친밀감과 정보값은 비례하지 않는다.

2주에 한 번씩 만나는 상담선생님은 뭐랄까 정보값은 크나, 친밀감은 높지 않았다.

선생님의 첫 질문은 늘 똑같았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는 질문에 매번 괜찮다고 답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부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었다.

그날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의 고민을 잘 들어준다는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나. 친구들의 고민 상담을 넘어 사촌언니들의 고민, 이모, 고모의 온갖 하소연과 이제는 후배들의 고민도 곧잘 들었다. 선생님은 웃으며 돈을 받지 않으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 왜 그렇게 다른 사람의 고민이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 들어주는 역할이 제 쓸모인 것 같아서요.


쓸모없는 나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누구든 나를 버릴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빠처럼 무능력하면 가족을 힘들게 하고, 엄마처럼 자식을 버리면 무책임하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다. 부모와는 다른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껏 살아왔다.

쓸모를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지도 말고, 무책임하다는 손가락질도 당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마흔이 넘어 생각해 보니 그건 복수였다. 부모를 향한 나의 복수였다.

나는 당신들과 달라요. 당신들처럼 무책임하지도 무능력하지도 않아요. 당신들을 통해 이 세상에 왔지만 당신들과는 다른 사람이에요.

부모를 부정하는 자식이었다는 것을 자각하자 죄책감이 밀려왔다. 부끄러웠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9살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태어나지 말 것을. 태어나지 말 것을. 만약에 다음 생이 있다면 절대로 다시 태어나지 말아야지. 하지만 이미 태어난 이생은 쓸모 있게 살다가 죽어야지.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이니까.



죽었던 감정이 들불처럼 살아났다.

부모를 향한 분노를 자각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불쌍하기만 했던 아빠가 이제는 더 이상 불쌍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아빠는 원 없이 살다가 돌아가신 거라는 말을 하는 순간 쿵하고 둔기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원 없이 살다가 갔다. 원 없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인가.


-삶이 힘들다고 술에 의지했죠. 현실을 잊고 살았죠. 그러니 원 없이 살다가 돌아가신 거 아니에요. 하늘 씨는 어때요? 삶이 힘들다고 술에 의지해서 현실을 잊고 사나요?

- 아니요. 힘들어도 참죠. 힘들어도 가족을 생각해서 일을 하러 나가죠.

- 그렇죠.

- 아빠는 아니에요. 직장에 들어가서도 한 달을 견디지 못했어요. 늘 자존심이 상해서 일을 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도 사회생활을 하니 그런 무슨 한 날도 참아요. 가족을 위 해서요. 맞네요. 아빠는 원 없이 자신이 편안대로 살다가셨네요. 불쌍하지 않네요. 오히려 불쌍한 사람은 저예요.



아 내 입으로 내가 불쌍하다고 했다. 남들에게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었다. 그런 말을 스스로 내뱉고 있었다. 불쌍하네요. 내가. 아 내가 불쌍하다. 가엾다. 내가. 어린 날의 내가 가여워서 마음이 아렸다. 그런데 오히려 질책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고. 선생님이 말했던 단어들에 감정이 실렸다. AI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하늘 씨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가엾지 않아요,라고 물었을 때도. 감정 없는 로봇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대답했다. 어린 시절의 하늘 씨에게 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라고 물었을 때도. 마음속에선 왜 더 노력하지 못했냐는 말이 떠올랐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을 뿐. 채찍질만 했다.

다르게 살아라. 부모와는 다르게 살아라.

그러기 위해선 참아라. 모든 것을 참아라.

너 하나만 참으면 다 해결되니 참아라.

채찍을 휘두르며 나를 다그치던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나였다. 이렇게 병든 나도 나을 수 있을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언제나 그 누구보다 나를 비난하고 몰아세웠던 목소리가 말을 할 것 같았다.

너는 낫지 못할 거야. 너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 거야. 이제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만 듣고 싶었다. 이제 그만 채찍질하고 싶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면 되었다. 그럼 되었다.

그럼 되었다. 휘두르던 채찍을 언젠가는 내려놓겠지. 언젠가는 내 손으로 버리는 날이 오겠지. 그렇겠지.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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