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조금은 느긋하고 싶은 우리에게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공부한다는 것은 상상이상의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공무원 공부는 나의 체력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나마 공부만 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오전타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구해 주 5일을 일하고, 오후 한 시부터 밤 열 시까지 공부했다. 차비를 아끼기 위해 중고자전거를 구해 왕복 40분 거리를 타고 다녔다.
점심은 편의점에서 얻은 폐기도시락이나 삼각김밥으로 때웠다. 일요일 하루 쉬는 날에도 집안 청소와 주 6일의 밑반찬을 만들었다.
두 달을 버티다 운 좋게 독서실 총무자리가 공석이 되어 옮길 수 있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비해 월급은 적었지만 일은 편했다. 오전 시간에 청소를 하고 오후 4시에 원장이 오면 교대할 수 있었다.
삼십만 원의 월급과 더불어 독서실비를 내지 않아도 되니, 좋은 일자리였다.
하지만 그 일도 오래 할 수 없었다.
스물네 살의 사회경험이라고는 아르바이트밖에 없었던 나는 순진했다. 독서실원장에게 아무 생각 없이 집안사정을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굳세어라 금순이 같다며 힘을 내라고 말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어깨를 터치하고 슬쩍슬쩍 엉덩이를 두드렸다. 명백한 성희롱이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독서실 총무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마음대로 그만둘 수 없다고 강압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날 독서실의 모든 짐을 빼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만의 동굴 안으로 숨어들었다. 두 달을 집에서만 생활하다가 다시 독서실로 돌아갔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다닐만한 곳이 그곳밖에 없었다.
당당하게 내 돈을 주고 다니기 시작하자, 독서실 원장도 행동이 달라졌다.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달리다가도 갑자기 나만의 동굴에 일주일이든 열흘이든 들어가서 숨었다. 내가 싫었다. 이 모든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내가 미웠다. 그런 날은 참을 수 없는 박해감에 내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런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조차도 나를 이해해하지 못하는데 타인의 이해도 한계가 있었다.
게으르다. 나약하다. 너는 절대 공무원이 못될 것이다.
그 당시 나를 아는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소리였다. 비단 타인뿐이었을까.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게으르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내 주위에 어른들은 말했다.
잠이 많은 엄마를 닮은 나에게 게으르다고.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는 나에게 누굴 닮아서 맨날 누워있냐고.
누굴 닮아서 그렇게 게으르냐. 누굴 닮아서 맨날 그렇게 누워있니. 그렇게 게으르면 나중에 어떻게 살려고 그러니.
평생을 나를 따라다닌 족쇄였다.
나는 게으르게 살지 않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 저는 제가 게으르다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 하늘 씨가 게으르다고 생각해요?
- 네, 잠도 많고 가만히 누워있는 걸 좋아해요.
- 그래서 집에서 누워있어요?
- 아니요. 게으른 느낌이 싫어서 계속 움직여요. 주말에도 쉬지 않고 움직여요.
- 그런데도 자신이 게으르다고 생각해요?
내가 엄마를 다시 만나고 놀란 점은 엄마가 전혀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일하고 움직였다.
게으르다는 그 오명은 누가 뒤집어 씌운 것일까.
나는 실체 없는 허상에 평생을 시달렸는 것에 허탈했다. 그 사실을 사십이 넘어 상담을 통해 알아차렸다.
우리를 버린 엄마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게으름이라는 가스라이팅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게으르게 살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애쓰며 살아왔다. 35살에 갑상선암에 걸렸을 때 담담했던 것도 그 이유였다. 생각보다 약하게 왔구나. 오히려 고마웠다. 그나마 갑상선암이라니, 내가 생각한 최악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아팠는데도 나는 변하지 않았다.
상담을 받으면서 여러 번 상담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는 과로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코로나에 걸린 이후 매년 독감을 앓았고 그게 아니면 늘 감기를 달고 살았다. 허리디스크, 유방의 분비물, 면역력의 저하에 따른 각종 염증들. 늘 자잘하게 병을 달고 살았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진심 어린 조언을 했다.
- 쉬어요. 마음이 아니라 몸도 쉬어야 해요.
어쩔 때는 단호한 어조로 강조했다.
- 그러다 과로사해요.
이 말을 들었을 때 선생님이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 타인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왜 매번 선생님은 나에게 그렇게 말했을까.
그 이유를 최근에 알았다.
상담 도중 선생님은 또 한 번 강조했다. 자신의 건강을 제일 1순위로 두고 행동하라고. 그리고 덧붙였다.
- 어릴 때 뭘 그렇게 잘 챙겨 먹고 컸을까요. 챙겨주는 엄마가 없는 아이가 영양섭취를 잘했을까요. 그러니까 그런 이른 나이에 암에 걸렸을 수도 있어요.
-...............
조용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어떻게 아는 것인가. 어린 시절 나의 주식은 라면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김에 싼 밥, 김치, 달걀프라이. 오일장에서 살 수 있는 반찬은 늘 한정되어 있었다. 마늘종, 무말랭이, 깻잎. 오래 먹어도 변하지 않는 반찬들이었다. 고기는 한 달에 한번 아빠의 월급날 먹는 게 다였다. 그마저도 아빠가 앓아누운 후 먹을 수 없었다.
원래도 몸이 약했다. 비위도 약하고 장도 약했다, 약을 먹으면 다 토해내고 기름진 걸 먹으면 화장실에 가기 바빴다. 챙겨주는 이가 없던 내가 뭘 그렇게 잘 먹고 컸을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비난받았는데 선생님은 알고 있었다. 동생이 말할 적이 있었다. 아빠가 아프고 나서 한 달 동안 라면만 먹었다고, 그 라면조차 살 돈이 없어 외상으로 사 오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기억나지 않았다.
- 왜 저는 기억이 나지 않을까요?
- 일상이었으니까요.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을 기억하나요? 그리고 그 라면을 누가 끓였을까요?
- 제가요. 제가 끓여서 동생과 먹었겠죠.
열세 살의 누이는 열한 살의 동생을 위해 매일 라면을 끓였다. 그렇게라도 살아내야 했으니까.
숨을 헐떡이며, 점점 얼굴이 노랗게 변해가는 아빠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굶지 않음에 안도했다가도, 점점 비어 가는 라면 상자를 보며 걱정했을 것이다. 정말 더 이상 먹일 라면이 없을까 봐.
선생님은 너무 아픈 기억과 감정은 스스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고 했다.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아예 무감하게 만들어버린다고. 그래서 나는 그 기억을 무의식 속에 꽁꽁 숨겼던 것이다. 동생이 말하기 전까지 기억하지 못했다.
- 아이가 뭘 그렇게 잘 먹고 자랐을까요?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잘 챙겨 먹고 쉬어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마요.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는 오래오래 곁에 있어주는 엄마예요. 무리하지 마요.
그 누가 이렇게 따뜻하게 말해줬을까.
어머니가 살림해 주시고, 아이들도 키워주시는데
네가 무슨 과로야.
내 마음조차도 나를 비난했다.
- 사람마다 체력이 다 달라요. 그런데 하늘 씨는 그동안 100%를 넘어서 200%를 끌어다 살았어요.
그러니 스스로의 건강을 챙겨요. 남들이 유난이라고 하더라도 신경 쓰지 말아요. 이제부터라도 스스로를 챙기는 연습을 해야 해요.
스스로를 챙기는 연습, 스스로를 돌보는 연습.
누가 뭐래도 나를 챙기는 연습.
그렇게 또 살아내어 보아야겠다.
조금은 이기적일지라도, 조금은 개인주의적일지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연습을 해보아야겠다. 아이들 곁에 오래오래 있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기에, 그렇게 불량엄마인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