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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쿠페 Jul 1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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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2021년이 떠나가고 있단다. 이제 2022년이 새로 올 것이라고. 급하게 오더니 떠나는 것도 참 급하게 떠나는군. 다음 해는 또 얼마나 빠르게 떠날지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온다. 2019년은 방황의 해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떠나보자는 마음으로 일 년을 보냈고 2020년이 왔다. 십의자리 수가 2가 된 것이 새삼 신기했는데 나만 그 2020이라는 숫자에 매료돼 멈춰서 있었나 보다. 그 사이 다른 사람들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취한 듯, 무기력한 듯 고민하는 일 년을 지나서 2021년이 됐다. 


드디어 좋아하는 일을 찾은 것 같았다. 그래서 돈과 시간을 써가며 그놈의 <자기계발>이라는 것을 해봤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을 쫓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아니 그것은 좋아함을 넘어 설렘을 주는 것이었다. 손끝으로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냈을 때의 기분이란 전에 느껴보지 못한 정도의 기쁨이다. 물론 진부한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시련을 하나 해결했다고 해서 그 후로 마냥 웃는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뒤늦게 뛰어든 이곳은 이미 나보다 앞선 선두주자들의 뒷모습들 때문에 앞이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고 내 실력은 늘 제자리걸음 같았다. 나를 의심하고 다시 스스로를 북돋아주고 다시 무너졌다. 난 안될 거라고, 망했다고 엉엉 울면서도 새로운 것을 배우러 걸어가는 걸음은 늘 기대에 차 신이 나 있었다. 이렇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극단적인 감정들에 뒤엉켜 2021년을 지나왔다. 2021년이 성급히 떠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뒤를 돌아봤다. 2년간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 봤지만 아직도 괄목할만한 성과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꼈다. 다들 앞으로 쭉쭉 나아가고 있는데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루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 괴로움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와중에도 아침은 돌아오고 있었다. 아직은 어두운 방안을 비척대며 가로질러 희붐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나는 아직 어제의 과제인 잠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성격 급한 세상은 벌써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다가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힐끔 쳐다봤다. 내 우울은 이 유리창에서 오는 것일까 아님 저들이 입고 있는 보송하게 다려진 옷들에서 오는 것일까? 


‘다들 꼭두새벽부터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나요? 얼굴은 잔뜩 찡그려져 있지만 어디 좋은데라도 가시는 양 성큼성큼 급하게 걸음을 재촉하시네요.’


이렇게 된 이상, 잠은 포기하자. 이토록 우울한 날은 극복하는 방법이 따로 있다. 바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끄집어내 머릿속에서 상영하는 것.  D를 떠올렸다. 처음 만난 날, 그는 알듯 모를듯한 언어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의 유려한 발음은 언뜻 노랫소리 같았고, 기어코 내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D는 날 항상 웃게 만드는 사람이다. 예전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자꾸만 쉽게 무너질 때마다 ‘넌 정말 강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며 등을 밀어내줬다. 


‘넌 쉽지 않은 인생을 잘 견뎌내고 여기까지 왔어. 이미 넌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넌 잘 이겨낼 수 있어.’ 


나보다 나를 더 믿고 확신하는 사람의 표정을 본 적이 있는가? 자꾸만 눈을 피하려고 해도 D의 눈동자는 진득하게 날 쳐다보고 확신을 보내온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라며 짐짓 핀잔을 줘도 그는 ‘글쎄, 근데 난 알아.’라고 말하며 어깨를 들썩일 뿐이다. 그 이상한 집요함과 억지스러움이 힘이 되는 날도 있었다. 그래, 어쩌면 ‘할 수 있는 나’에 대해 잘 아는 건 나보다 너인 것 같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쭉 함께했던 그 고요한 눈동자. 2019년 늦여름 환한 미소로 나를 내려다보던 그는 아직도 내 곁에서 노랫말 같은 언어로 말을 걸어온다. 평생 우울이라고는 느껴보지도 못했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우리가 삼 개월간 함께 했던 시절의 테이프도 꺼내 틀어보자. 언제나 긍정적인 기운만 뿜어내던 그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날도 있었다. 그는 이따금씩 이지적인 표정을 한 채 생각에 잠기곤 했는데, 그가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는 동안 나는 그의 반쯤 가려진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날 가만히 내버려 둬 줘요.라고 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아무런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나의 긴 우울에 D는 맑은 빛깔의 조약돌 같은 몇 마디의 위로와 응원을 꼭 손에 쥐어주곤 했었는데. 그런 다정한 행위가 서툰 나는 자칫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그와는 다르게 자그락거리는 따가운 질문들을 쏟아낼까 무서웠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가 그런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을 때 조용히 그와 내 앞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놔두는 것이다. 아마 D는 차가 차갑게 식을 때까지 다 마시지도 못하겠지만 내가 건넨 차 한 잔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 테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괜찮아지면 말해줘.’


 창밖은 어둡고 집안도 서늘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포근한 공기가 맴돌았던 그날 저녁의 풍경이 떠오른다. 우린 앞으로도 이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위로를 건넬 테다. 그러다 언젠가 우리 사이에 관계라는 것이 사라질 수도 있겠지. 그렇담 많이 슬프고 아쉬울 것 같지만 그래도 D가 남겨둔 온기가 있는 기억들 덕분에 며칠은 더 살아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의 갈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항상 누구보다도 너 자신을 최우선으로 두라며 입이 닳도록 말하던 그의 영향일까. 이제는 어떤 관계의 있는 사람이든 나보다 소중한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내게 왔다가 떠나기를 반복한다. 지금의 소중한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고 순조롭던 일들이 꼬이기 시작할 미래의 어느 날, 그때의 나는 무너질지라도 혼자라도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는 사람이길 바란다. 


 몸이 나른해지고 생각하는 것도 귀찮을 만큼 몽롱함이 몰려온다. 포기했던 잠이 쏟아진다. 위로고 뭐고 잠부터 자고 싶다. 푹 자고 나서 다시 생각하자. 내일의 일도, 모레의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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