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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쿠페 Jul 18. 2024

봄과 여름 사이의 그 순간들은 뭐라고 부르나요

 조는 그를 처음 봤을 때의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잠깐 보고 가라는 조의 말에 그는 아직 멀리 가지 않아 근처에 있으니 그녀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말했다. 조는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문 밖으로 나섰고, 길가에 낯설게 생긴 사람들 틈에서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를 찾았다. 며칠 전, 1분 남짓 짧은 통화의 느낌대로라면 그는 재수 없고 오만한 사람이었다. 평소라면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텐데 왜인지 조는 그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조는 두꺼운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두리번거렸고, 이내 그녀의 옆얼굴로 그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그는 조의 오른편에 서서 어색한 표정으로 꾸벅 목인사를 하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사람의 첫인상이 결정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0.1초 정도라고 하던가? 조는 그 짧은 순간동안 이 사람과 지독하게 얽힐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단정하고 정갈한 그의 옷차림에서 단단한 내면이 보였고 말투와 표정에서 선하고 어른스러운 품성이 느껴졌다. 초승달처럼 가느다란 실눈을 그려가며 내던 웃음소리를 들으며, 조는 그에게 알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이상하게 끌리는 감정에 조의 머릿속은 반동적으로 위험의 빨간 불을 켰다. 고요하던 머릿속에 일던 파동. 조와 그는 한동안을 서점 앞 길 한가운데에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에 치여 이쪽으로 물러났다, 저쪽으로 물러났다를 반복하며 한참을. 사람들은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떠드는 둘을 보며 아마 오랜만에 만난 친구사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취향과 고민거리들까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나눈 후,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선 조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며칠 뒤 조는 그와 점심 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가 알면 알 수록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꽤 재밌는 사람이었다. 첫 만남에서 느꼈던 감정이 식사자리 내내 불쑥불쑥 느껴졌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미 조의 일상은 새로운 사람들로 넘쳐나 있었고 굳이 또 새 인연을 삶에 초대할 이유도, 욕구도 없었다. 그렇게 조의 머릿속에서 그는 잊혔고 서로는 다시 관계의 경계에서 비켜졌다. 






 그와 마지막으로 함께 한 날, 조는 잠든 그의 귀를 어루만졌다. 어릴 적 조의 아버지가 그녀를 품에 안고 재울 때 늘 아버지의 귀를 만지작댔던 것이 아직도 잠들기 전 사랑하는 사람의 귀를 만지는 습관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잠든 그의 숨소리를 느끼면서 조는 울음을 삼켰다. 편안하게 자는구나. 다행이다. 조는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쭉 돌아봤다. 사랑이 시작되던 순간들과 질투로 끙끙대던 밤들. 조심스럽고 행복했던 데이트. 눈물로 써 내려간 편지들과 서로를 떠올리며 준비했던 선물들. 다툼과 약속, 이별까지 이어지는 모든 기억들을 되새겼다.



'이상한 만남이었지만 연인 사이에서 할 법한 것들은 모두 다 해봤네.'



 그와 함께 했던 사소한 것들이 좋았다. 일이 끝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먹던 늦은 저녁식사가, 쨍한 태양을 피해 그늘 아래 테라스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그 한낮의 풍경이, 함께 장을 보고 먹고 싶었던 음식을 서로에게 만들어 주던 예쁜 마음이, 그가 담배를 피울 때 훔쳐보던 가지런한 손가락이, 아무도 모르게 몰래 사랑을 표현하던 둘만의 비밀이, 서로의 살냄새를 맡으며 잠을 청했던 밤이, 아카시아를 좋아하는 조를 위해 활짝 핀 아카시아 나무 아래로 이끌던 부드러운 손이, 자전거로 강둑을 달리던 아주 늦은 밤, 뒷자리에 앉아 어깨너머로 본 그의 옆얼굴이 좋았다.


 어떤 날은 환하게 웃어 예쁘게 휜 눈에 사랑스러움이 묻어났지만 어떤 날은 물방울 모양으로 굴곡진 눈매에 단호함과 진지함이 서려있었다. 함께 있는데도 간혹 혼잣말을 하던 그의 모습에 조는 혼자 있을 때에도 그렇게 혼자 중얼거릴 그를 상상하며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그의 살결을 쓰다듬으면 그의 손이 조의 손을 쫓아와 깍지를 꼈다. 조는 그의 그런 모습이 좋았다. 조가 하는 행동에 늘 그는 바로 반응을 보였다. 조가 말을 시작하면 언제나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고 조가 움직이면 그도 일어나 움직였다. 조는 어쩌면 그의 모든 행동을 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 잘 정돈된 그의 방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그의 사고방식. 다정하고 세심한 행동. 따뜻한 포옹. 점잖은 목소리. 삶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 모든 것을.




 조의 진심이 담긴 첫 번째 편지를 읽은 그날, 그는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는 조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를 구했다. 어쩌면 우리의 결말이 해피엔딩일지도 모르지 않냐면서. 조가 눈물로 잔뜩 젖은 얼굴로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던 날, 그는 울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등뒤로 보이는 하늘은 조의 얼굴처럼 잔뜩 젖어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비 한 번 거하게 내리네, 참.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왜냐는 그녀의 질문에 그는 이게 맞는 길이야.라고 천천히 말을 뱉었다.


 '맞는 길이라는 건 없어. 누구나 다 가고 싶은 길로 가야 하는 거야. 그래야 하는 거야'



 조는 그가 하는 말을 다 믿지 않았다. 그가 가져오는 이유들이 모두 허무맹랑한 핑계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들이 핑계건 사실이건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조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미련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이 오고 비가 다시 내린다. 지난밤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기에 조와 그는 슬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부러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음소리로 슬픈 침묵을 채웠다.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가슴에 무언가 턱 하고 막힌 듯한 느낌에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가 무슨 세기의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조는 가끔 복잡하고 심각한 상황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녀는 두렵고 절망적일 때 늘 상황을 객관적이고 가볍게 만들기를 좋아했다. 몇 발자국 떨어져 본인이 처한 상황을 멀리서 바라보면 모든 것들이 간결해진다. 조는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한다. 많이 배웠고, 진심이었으니까 됐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봄이 떠나고 있다. 곧 여름이 올 테다. 우리들의 잠시동안 반짝거렸던 시간들도 지나고 있다.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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