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세상에 기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은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잘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좋아하면서도 잘하는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1) 재능을 살릴 수 있는 국가에서 태어났거나 국적과 상관없이 그런 여건에서 산다.
2) 좋아하는 일의 즐거움과 잘하는 일의 성취감을 동시에 느끼며 산다.
3) 이미 충분히 풍족하거나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충족할 정도의 돈을 번다.
4)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거나 좋아하는 일보다 압도적으로 적게 하며 산다.
누군가는 돈이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누구는 돈은 가장 많지 않지만 평생 놀아도 될 정도로 돈이 많은 상태에서 시간이 많으면 가장 운이 좋고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 대해서 현명하다 알려진 과거와 현재의 현인들은 물론 최근 발전을 거듭하며 일반 교양인들에게도 익숙한 뇌과학 입장에서도 그렇지는 않다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돈이 가장 많은 사람도, 돈이 충분히 많으면서 시간이 많은 사람도 결국 놀기만 하면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노는 것이 행복한 순간은 신체와 정신이 과도하게 지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충분히 힘든 과정들을 마친 뒤 비로소 휴식을 취하며 여행이든 충분한 수면이든 각자의 여가를 즐기는 순간입니다. 노는 것이 일상이 되면 그때부터 노는 것은 또 다른 노동이 됩니다. 뇌과학에서 우리 뇌의 도파민이나 세로토닌의 작용을 규명하기 훨씬도 더 전에 중학교 교과서에서도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철학자들은 대부분 이런 쾌락의 위험성과 허무함을 경고해 왔습니다.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모든 쾌락이 반복되면 그것은 일상이 되며, 그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특별함 쾌락을 찾아 나서는 순간 평화로운 일상 혹은 마음상태는 사라진다고. 그렇게 세상은 무엇보다 허무한 지옥이 될 것이라고.
그런 삶을 살아보기나 했으면 좋겠다는 반응들이 일부 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공감됩니다. 하지만 이런 예언은 우리 삶에서 충분히 현실이 되어왔습니다. 아니, 신체 건강하고 국가에서 정한 사회적 지원 대상자가 아니라면 이미 현실입니다. 2025년 현재 30살이 넘은 사람들은 대부분 어렸을 때 반찬 투정을 할 때면 부모님께 '엄마 아빠 때는 계란도 귀해 자주 못 먹었다.'는 투의 문장들을 숱하게 들었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취 대학생으로 살다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서 몇 년만 일해본 사람들도 '자취생 때는 분명히 맛있었던 대학가의 값싼 식당 음식들이 이제는 왜 이리도 맛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다들 합니다. 그리고는 말하죠. '왜 이렇게 맛있는 집이 드문가.'하고.
많은 사람들이 옛날 음식을 더 그리워하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주변에 맛있는 음식들이 너무 많아져 어지간히 맛있는 음식에는 혀가 둔감해졌을 뿐 과거보다 맛없어진 음식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짜장면이 그렇습니다. 40세도 넘지 않은 분들께서 '요즘 짜장면은 라드유(돼지고기에서 나오는 기름)를 쓰지 않아 내가 어렸을 적 먹은 짜장면보다 더 맛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70대 어르신들께서도 짜장면은 당신께서 어렸을 적 먹던 짜장면이 훨씬 맛있었다고 말씀하시죠. 그런데 의아한 점은 돼지고기 기름을 쓰는 짜장면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거의 모두 사라지는 추세였기 때문에 지금 40대 중반이 채 되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대부분 어린 시절 돼지고기 기름으로 만든 짜장면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1990년 중반만 해도 '아직도' 돼지기름을 쓰는 '일부' 중화요릿집이 있다며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으니까요. 이번에는 70세를 훌쩍 넘기신 어르신들의 어린 시절 짜장면은 어떨까요? 어르신들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1960년대에는 짜장면의 주재료가 양파와 돼지고기가 아니라 무말랭이와 대파였습니다. 양파를 볶을 때 나는 특유의 단맛과 감칠맛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데다가 돼지고기는 1970년이 훌쩍 넘어가기 전까지는 귀해서 고급 요릿집이 아니면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지요.
그러니까 옛날의 짜장면에 요즘 어른들이 느끼는 향수는 짜장면과 탕수육이 1달에 1번 먹기도 힘든 외식 메뉴이던 시절, 돈까스를 생일 특식으로 먹을 정도의 메뉴이던 시절의 감성이 우리의 기억을 왜곡한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렇게 돈이 아주 많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이미 감각적 쾌락이 익숙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 삶을 살고 있지요. 2025년 11월의 대한민국에서는 말입니다.
어쩌면 쾌락과는 거리가 먼 일로 일상의 상당 부분, 심지어 대부분을 채우는 삶은 행복의 필수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초등학생도 다소 따분할 수도 있는 한 학기를 잘 보내야 방학이 즐겁고 직장인도 일을 하고 난 다음에야 휴식이 달콤하기에 우리는 행복한 여가와 휴식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는 무엇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잘하면서도 좋아한다? 이건 정말 휴식과 일 양쪽에서 에너지를 얻는 삶이기에 누구나 동경할 만한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누구나 살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히려 극소수만이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을 확률이 크지요. 흔한 일반인들은 좋아하고 잘하는 일만 하면서 생계와 노후대비에 충분한 돈을 벌기는 힘듭니다. 또 한 편으로는 좋아하면서도 잘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했는데, 사실 그 역시 그 일이 마냥 좋기만 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니까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와중에도 그 일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숙명인 이 사회에서 지속하려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든가, 귀찮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한다든가 하는 하기 싫은 일을 수반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요리를 좋아하고 잘해 요리사가 된 사람도 보통 요리만 하지는 않습니다. 일부 인격이 성숙하지 않은 손님과 실랑이를 벌이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고 식당을 청소하는 등의 싫어하는 일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는 시간보다 긴 경우도 다반사겠지요. 축구를 좋아해 축구선수가 되어도 겪고 싶지 않은 부상위험을 일상으로 달고 살아야 합니다. 고연봉의 사무직은 어떨까요? 고연봉의 사무직에게 '당신은 좋아하면서 잘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과연 100명 중 몇 명이 그렇다고 답할까요? 다들 잘하는지는 몰라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을 것입니다. 혹은 좋아하고 잘한다고 답하는 사람이 일부 있더라도 '평생 이 일을 하고 싶습니까?' 하는 질문이 이어진다면 사무실에서 겪는 여러 상황들을 떠올리며 그건 아니라고 할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거나 잘하지 않는 일, 심지어는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않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갑니다. 그것이 우리 삶이 어려운 이유이지요. 좋아하지 않거나 잘하지 않는 일 속에서 싫어하는 일과 사람을 지속적으로 당면하다 보면 잠도 잘 오지 않고 식욕도 없어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 먹기도 힘듭니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죠. 몸에 안 좋은 일은 다 하면서 사는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을 그만둘 수 없다면, 혹은 그만둔다 해도 딱히 그만둔 이후에 생계를 더 잘 꾸려갈 대안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해 이번에는 책 먼저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중학교 사회 시간에 처음 접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애덤스미스라는 사람이지요. 엄밀히 따지면 애덤스미스가 살던 당시에는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없었기에 철학자, 혹은 인문학자라는 말이 정확하지만 그의 사상을 해석하고 발전시키면서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져왔으니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그의 별명은 타당합니다.
우리는 애덤스미스를 흔히 '이기심 옹호론자'라고 배웁니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까닭은 푸줏간 주인이나 제빵사의 박애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 덕분이다.'라는 그의「국부론」 속 문장은 정말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를 '이기심을 옹호하는 학자'로 많이들 알고 있죠.
딱 이 부분만 보고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을 돌아보면 '일은 그냥 돈 벌기 위해서 하는 것. 그뿐이야.'라고 마음먹기 쉽습니다. 우리를 지옥에 빠뜨리는 마음이지요. 월급날 하루 좀 일의 의미를 느꼈다가, 그 이후에는 월급날과 주말만 바라보며 일요일 저녁에는 다시 월요일을 맞아 일을 할 생각에 한 껏 우울해지는 우리의 평소 마음가짐입니다.
그런데 「국부론」은, 또 더 나아가 애덤스미스는 우리가 하는 일을 대할 때 결코 이렇게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일은 돈 벌려 하는 것. 그뿐.'이라는 생각은 그의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저서 「국부론」,「도덕감정론」 중 「국부론」만 읽었거나, 심지어는「국부론」도 제대로 읽지 않은 해석입니다.
지난 글에서도 다뤄봤지만 국가가 그 나라의 국민들로 하여금 행복과 풍요로움을 늘려가는 과정과 개인이 본인 스스로의 삶에서 행복과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과정은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애덤스미스의 사상을 대표하는 「국부론」,「도덕감정론」 두 책은 이런 면모를 매우 깊게 다루는 책입니다. 가장 유명한「국부론」이 국가가 어떻게 풍요로워지고 윤택해질 수 있는 지를 다룬 책이라면 「도덕감정론」은 본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 개개인이 어떻게 이타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지를 다룬 책입니다. 그러니까 두 책을 연결해 한 문장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익추구 성향을 갖는 인간이 어떻게 이타적이고 도덕적인 마음도 함께 함양하며 국가의 부를 증진시킬 수 있는지 설명해 주는 두 책."
그러니까 「도덕감정론」이 한 나라를 이루는 인간 개개인을 다루며 「국부론」의 전제를 형성하지요. 개인이 없으면 국가는 당연히 없는 것이니까요. 이에 따르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진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어려운 말 갖지만 예를 들어 생각하면 쉽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더라도 우리의 이익이 늘어난다면 그걸 감수하고 이익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본인들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극히 슬픈 일을 맞이했을 때 함께 아파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기적인 마음과 행동으로 사회를 혼탁하게도 하지만 누군가 이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양심)에 죄책감을 가지고 반성하며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그저 우리의 평소 모습을 설명해 주면서 이타심과 도덕이 이기심과 조화를 이루는 개인들이 되기를 강권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이기심과 이타심이 조화를 가진 개인이 국부론에서 말한 '부유한 국가'를 이루는 핵심 전제입니다. 그러면 '부유한 국가'를 '부유한 개인'으로 바꿔 생각해 보면 우리가 부를 위해 일을 하는 마음 역시 애덤스미스가 좋은 사회, 사람의 강력한 전제조건으로 말한 이타심과 도덕을 장착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언뜻 들으면 그저 이상주의적이고 비현실적인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잠깐만 생각해도 가장 현실적인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현실을 보는 관점이 극히 협소했을 뿐입니다. 당장 자신이 속한 직장 혹은 사업현장에서 진실된 웃음을 가장 많이 보이는 사람을 떠올려봅니다. 아니 아니, 사장님 말고요. 가까운 동료 중에서요. 네, 맞습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동료이지요. 동료들과 고객들을 도우려는 진심을 가지고 하루하루 일을 하는 동료 중 한 명이 떠오를 겁니다. 동료와 고객을 도우려는 이타심과 본인 건강을 위해 과도한 무리는 하지 않겠다는 합리적 이기심을 양립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고 지속가능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생활인 것이지요.
한 편으로 정말 대성한 사업가들을 역시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취한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사업 분야 자체에 흥미를 느끼고 몰입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혁신을 거듭했거나, 처음에 사업성을 보고 접근했더라도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용 이상의 만족을 주는 이타적 결과를 만들 수 있었던 사람만이 큰돈을 벌 수 있었지요.
뭐, 그래도 막상 매시간 부딪히는 현실은 항상 불완전하고 부족합니다. 부족하거나 잘 맞지 않는 상사를 만나 1분 1초가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요. 그런데 그 상황을 타개할 방법 또한 '이타심과 이기심의 합리적 양립' 밖에는 없습니다. 그에게 화를 낸다고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지요. 그런다고 그렇게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마냥 수용해 준다고 해도 내 속이 곪습니다. 내가 그 현장을 떠나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어야지요. 동료가 맞지 않아 떠나야 한다면 고객이라도 제대로 만족시킨 이력, 경험, 경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저 월급날, 주말만 바라보며 '월급 주는 만큼만 일하자. 아니 가급적 덜 기여하고 더 많이 받자.' 하는 심보로는 평생 더 나은 삶의 여건을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하루하루만 지옥으로 만들 뿐입니다.
때문에 애덤스미스의「국부론」, 「도덕감정론」이 주는 울림은 인간의 지속가능한 행복을 위해 필요합니다. 다만 이 두 책. 매우 두껍습니다. 두 책 합쳐서 1천 페이지가 넘어가는데 한 문장 한 문장 읽기 쉽게 쓰인 것도 아니에요. 결국 애덤스미스 사상을 두 책 모두의 관점에서 다룬 책을 읽으며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조나단 B. 와이트의 「애덤 스미스 구하기」, 러셀 로버츠의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 책들이 애덤스미스의 사상을 완벽히 정확하고 적확하게 소개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 각자의 개인적 생각을 애덤스미스의 저서에 담아 드러내기도 하지요. 지금 이 글을 쓰는 저처럼 말입니다. 예를 들어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에서는 시스템을 바꾸려 노력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사회는 복잡해서 개인이 바꾸자 하는 대로 바꿀 수 없다고요. 일면 타당하지만 애덤스미스를 인용해 이렇게 결론 내리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애덤스미스가 함부로 세상을 바꾸려 들지 말라 경고한 대상은 권력자들입니다. 애덤스미가 살던 당시는 입헌군주제로 국민들 대부분이 투표권을 가지지 못한 채 수동적인 사회적 일원으로 살아갈 운명을 갖고 태어났지요. 하지만 그런 수동적인 개인들조차도 복잡한 사회의 일원이고 그 개인들의 행위가 모여 누구도 의도하지도 상상하지도 않은 결과들이 만들어지기에 권력자들이 마음대로 체스의 말처럼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경고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선진화된 국가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고, 오히려 개개인이 정치적인 책임을 가진 주체로서 각자의 생각과 각자의 신념을 가지고 정치적 참여를 할 권리, 심지어는 의무를 갖습니다. 그런 책임 있는 행동이 모여 각 서로의 갈등이 합리적인 사실과 논리에 근거해 조정되어 나갈 때 복잡한 세상이 더 바람직하게 굴러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모든 독서가 그러하듯 여기서 소개한「애덤 스미스 구하기」,「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과 같은 한 사람의 사상을 자세히 다룬 책을 읽을 때에도 책에 쓰인 모든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비판적인 독서를 필요로 합니다. 이를 통해 애덤스미스의 사상 전체를 쉽고 넓게 조망해 본 다음 애덤스미스가 직접 쓴 원서에 도전하는 것은 아주 좋은 생각일 것입니다.
아무튼 이 세상은 누구도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 속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 마주치는 사람에게 기여하고자 하는 노력을 본인의 신체와 정신적 건강이 지켜지는 범위 내에서 열심히 하며 살아간다면 이타적이고도 합리적인 이기심을 가진 인간들이 이룬 국가가 자유로운 서로의 경제활동 속에서 번영을 이뤄가듯, 우리도 매일매일 조금씩 행복과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애덤스미스의
「국부론」, 「도덕감정론」에서 말한 것처럼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