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나 그리고 하늘만 아는 비밀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
준희와 나는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부모님이 미국에서 비즈니스를 하시고 대학을 다니는 큰 오빠와 언니가 준희를 돌보며 살았기에 준희는 외로움이 많았던 것 같았다. 그때는 너무 어려 그것도 몰랐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열세 살 아니 좀 더 자라 열일곱열여덟이 되었다고 해서 부모님이 그립지 않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준희는 늘 친구가 옆에 있어야 했다. 워낙 예쁘고 부티 나게 생긴 데다가 실제로 집이 여유로웠으니 주변에는 따르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준희는 늘 친구를 고파했다. 그런 준희와 나는 베프였다. 중학교 2학년 즈음인가부터 준희와 나는 작은 일기장을 공유했는데 하루 준희가 일기를 쓰고 다음날 학교에서 돌려주면 내가 그 일기 읽고 내 일기를 쓴 다음날 돌려주는 그런 방식이었다. 정확히 무슨 내용을 썼었는지 까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나이 또래들의 고민과 상처 비밀들이 적혔으리라 생각된다. 준희는 배우 이영애를 닮아 방송국에서 카메라 테스트라는 것도 받을 정도로 외모가 뛰어났는데 그 덕분에 주변 남자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축제 기간에는 방송반이라는 특혜로 옆 남학교 방송반의 초대로 축제나 행사에 가기도 했었다. 그런 준희를 난 잃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일기장 속 내용은 준희 나 그리고 하늘만 아는 비밀이 되었었다.
그러던 준희에게 비밀이 생겼다. 일기장에 적지 않는 내용이 생겼다. 하루 종일 넋이 나간 것도 같기도 하고, 불안한 것 같기도 하고, 행복한 몽상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방송반 아이 두세 명이 모여서 "나 씨"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속닥이다 제자리에 돌아와 또다시 몽상에 빠지는 것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수학문제 풀이 공책에 그려진 다리가 유난희 길고 슬림한 체격의 남학생 스케치를 보게 되었고 나와 눈이 마주친 준희는 비밀을 털어놓게 되었다. " 이거 비밀인데.... 얼마 전에 내가 ㅅ ㅈ 고등학교 갔었잖아. 그 후에 그 학교 애들이랑 단체 미팅을 했거든. 근데 그 학교 밴드부에 정말 너무너무 잘생긴 애가 있는 거야. 키도 크고 다리는 미친 듯이 긴데 그 애가 또 농구부인 거 있지! 농구도 겁나게 잘하는데 더 사기 캐릭터인 거는 공부도 너무 잘해서 서울대는 무난히 갈 거래. 너무 멋있어! 자꾸 생각이 나서 집중이 안 돼. 잠도 안 와. 입맛도 없어" 내가 밑도 끝도 없이 "나승호?" 하고 물으니 준희는 펄쩍 놀라 뒤로 자빠질듯한 리액션을 취한다. "너! 그 애 알아???????", " 응, 초등학교 때 우리 반 반장!" 나는 비밀을 지키기로 하곤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난 그 비밀을 지켰다. 그런데 며칠 후 그 비밀이 누설되었다. 누설자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체 미팅에 나갔던 아이들은 교무실에 불려 갔고 주동자는 근신 처분을 받았다. 반성문을 매일 써서 냈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미팅이나 소개팅등에 관한 학칙이 너무도 엄격해서 부모님이 불려 가기도 하고 근신조치나 정학 처분을 받는 사례가 실제 있었다. 지금이야 "말도 안 돼" 하겠지만 기독교 여학교인 우리 학교는 그랬다. 미팅은 중대 범죄자 취급받았다.
오늘 아침 성경 말씀에 누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호수아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그들을 쫒는 여리고 왕의 부하들에게 거짓말까지 해서 추격을 따돌린 라합 이야기이다. 비밀은 철없는 아이들의 소꿉놀이 같은 수준의 비밀도 있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비밀도 있다. 한 나라가 일어서고 망하는 정도의 비밀은 목숨을 건 비밀이다. 라합은 기생 신분이었지만 한 나라가 지고 새로운 나라가 일어섬을 감지한 선견지명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용감했고 지혜로웠으며 이기적이지 않았으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에는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너와 내가 그리고 하늘만 아는 비밀을 나눌 때는 그 비밀의 넓이와 깊이 크기를 내가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누설 시 닥칠 모든 책임을 나도 지게 되지만 상대방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나만큼 상대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라합은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그 가족을 둘러싼 확대가족까지 살려줄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두고 명세할 증표를 요구하는 지혜로움과 대범함을 보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이 떨려 정신이 혼미할 지경에서 조차 다음을 내다보는 그녀의 평정심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만일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이 보내신 정탐꾼을 만난다면 난 과연 그들을 알 볼 수 있으려나? 혹여라도 그들이 세상의 추격군에 쫓긴다면 난 그들을 숨겨주고 탈출을 도울 수 있으려나? 나는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려나? 어쩌면 나는 수도 없이 그들을 만났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는지도, 그들을 감춰주지 못하고 그들의 비밀을 누설시켰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무리 사소한 비밀이라도 감추고 싶은 비밀이라면 어렵게 꺼낸 이야기라 세상에 알려지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면 우린 목숨처럼 귀하게 지켜내야 한다. 오늘도 부지불식간에 내게 온 여호수아의 정탐꾼과의 비밀을 지킨 사람이길 바라본다. 먼 옛날 준희와 지켰던 비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