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드러내는 비언어
어릴 적 읽었던 이솝 우화 내용 중 바람과 해님의 힘자랑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외투를 입고 지나가는 나그네를 두고 왜 갑자기 해님과 바람이 누가 더 힘이 센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는지 그 이유는 기억나지 않으나 나그네 외투 벗기기를 위한 두 가지 다른 접근 방식에 대해 반백의 나이에 다시 이야기를 생각해 보니 재미있다. 이 이솝 우화의 교훈은 바람의 완력에 의한 외투 벗기기 방법론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강압은 지혜롭지 않으며 나그네 스스로 외투를 벗도록 환경조성한 해님의 방법이 지혜로운 것이다로 결론 맺는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이럴 때 바람은 나그네 외투 벗기기가 아니라 나그네 날려버리기를 택했어야 이길 수 있는 게임이었다. 아니 어쩌면 제삼자 구름을 끼워 넣어 비를 내려 승자가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했다. 이유인즉슨 만일 그 외투가 우리는 감히 상상도 못 하는 가격의 명품 외투였다면 말이다. 얼마 전 드라마 속 여 주인공은 남들에게 지기 싫어 명품백을 12개월 할부로 구매했는데 하필 예보도 없던 비가 내리자 주저 없이 외투를 벗어 명품백이 젖지 않도록 감싸않고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는 장면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만일 이 나그네가 그런 명품 외투를 걸쳤다면 그 나그네도 어쩌면 외투를 벗어 곱게 접은 후 자기 옷 속에 넣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야기 속 외투는 우화 속이나 현실 속이나 추위를 이기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부터 나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나도 남들이 말하는 명품 외투를 가지고 있다. 두 개는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께 사드렸다가 유품으로 다시 내게 돌아온 명품 외투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산 내 외투이다. 그런데 이 세 외투가 세상 구경을 잘 못한다. 분명 입으려고 샀는데 입고 갈만한 곳이 별로 없는 데다 행여 오물이라도 어디서 묻어오면 그 명품 외투 세탁비가 너무 비싸서 옷장에 걸려있는지가 몇 년이다. 친정어머니도 그러셨었다. 오랜 시간 그렇게 외롭게 쓰임 받지 못하던 명품 외투들이 그대로 낡아져가고 있다. 그럼 난 이 외투를 왜 그 큰 거금을 주고 샀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남들에게 지기 싫어서다. "나도 이만큼은 걸칠 정도로 능력이 돼, 나 이런 정도의 경제력 있어!" 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거다. 남들과 내가 다르다거나 남들과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 드러내고 싶었던 거다. 누구나 그런 욕심은 있다. 세상은 그걸 보는 눈이라 하고 안목이라 할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욕심이 과연 필요한가 싶다.
오늘 아침 성경 말씀에 하나님의 전리품에 관한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를 몰래 훔친 아간의 행동 때문에 진노한 하나님으로 인하여 서른여섯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는 장면이 나온다. 그 시날 산의 외투가 뭐였길래 서른여섯 명의 장정이 죽임을 당할까? 물론 아간은 외투와 함께 금은동도 훔쳐 집에 숨겼다. 훔친 명품 외투를 아간은 떳떳이 입고 다닐 수 있었을까 전시 상황 중에? 아니다. 금은동도 당장 현금화해서 쓰기 쉽지 않았을 것이고 명품 외투도 입고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광야 생활 40년을 했던 이스라엘 족속이 사는 게 뻔했고 다 남의 집 숟가락 젓가락 숫자까지 다 아는 이웃들인데 그들의 눈을 쉽게 피해서 입고 자랑할 곳이 있었을까? 아니 없었을 것이다. 입고 갈 곳도 자랑할 곳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훔쳤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마음속 어디선가 " 나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는데 이 정도 가질 정도는 돼. 내가 내 몫으로 조금 챙겼다고 누가 알겠어?" 했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말씀을 읽으니 옷장 속 낡아져 가는 나의 외투와 아간의 집에 숨겨져 있던 시날 산의 외투가 뭐가 다를까 싶다. 해님과 바람이 쓸데없는 비본질적 문제로 힘겨루기를 하듯 나도 세상과 결코 중요치 않는 것을 두고 힘겨루기를 했으며 아간은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감히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고 속일 수 있는 능력이 된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아간! 아간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세상적 탐심을 되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