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폭력적인 연명장치
2024년 12월 다리가 불편하신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서울 시내 곳곳 아름답게 꾸며진 크리스마스 장식과 청계천 빛초롱축제도 구경시켜 드리고 따뜻한 호텔에서 몇 년 만에 샤워가 아닌 통목욕도 시켜 드릴 겸 나는 삼 주간 한국 여행을 계획했었다. 독감이 유행하는 계절인 데다 의료계 파업에 코로나도 언제 또 기승을 부릴지 모르니 나는 어머니가 코로나 추가접종은 안 하시더라도 독감 백신을 맞을 것을 권했고 어머니는 충성스럽게 내가 도착하기 하루 전 독감 주사를 맞으셨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미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감 주사를 맞은 것으로 생각된다. 어머니는 내가 도착한 날부터 기운이 없으셔 말씀도 제대로 잘 못하시고 식사도 잘 못하셨지만 이거 하나 하겠다고 삼 주간 휴가를 내고 19시간을 비행기로 날아온 나는 병원에 먼저 모시고 갈 생각도 안 하고 바로 호텔로 모시고 갔다. 첫날은 너무 피곤해하시는 듯하여 간단한 요기거리만 드시게 하고 그냥 주무시게 했고 그다음 날에는 내가 계획한 대로 목욕을 시켜드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컨디션이 계속 안 좋아지고 있었는데 내 눈에 그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저녁엔 잠시 잠깐 휠체어를 끌어 시내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러 나갔었다. 그런데 너무 추웠던 것인지 어머니가 사시나무 떨듯이 온몸을 떠시는 것이었다. 목욕 후 한참 지나고 나선길인데 혹시라도 한기가 들린 건 아닐까 싶어 얼른 호텔로 다시 돌아와 몸을 녹여 드리려고 침대에 눕혀드리곤 시차 적응이 안 된 나는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녘 저녁 식사도 못 챙겨 드린 게 생각나 잠시 눈을 떴을 때에는 어머니 몸이 불덩이 같이 열이 오르고 의식이 없었다. 119를 불러 응급실을 가려했지만 의료계 파업이 한창이던 때라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구급대원이 이곳저곳을 전화하며 받아주는 곳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연세 세브란스 병원에서 심장내과 및 다른 진료를 받고 계셔 그곳에 가야 했지만 받아주지 않았고 가장 가까운 삼성 병원도, 은평성모병원도, 서울대 병원도 다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뒤늦게 도착한 곳이 한남동 순천향병원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크리스마스의 구원의 밝은 빛이 비치는 곳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어쩌면 내 어두운 크리스마스 역사의 서막을 알리는 복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밤과 낯을 가리지 않는 탄핵 시위대의 구호와 이를 반대하는 태극기 부대의 아우성이 한남동이란 공간을 채워버렸다. 밤이면 시위대는 병원 앞을 구호와 함께 행진을 했고 바깥세상의 이런 요란한 대립과는 무관하게 병원 안에서는 전공의 사직으로 의료체계를 비워버렸다. 간병간호통합 병동에서조차 24시간 보호자나 간병인 없이는 환자를 돌볼 수 없었고 예약된 검사는 이유 없이 취소되었으며 퇴원하려고 짐 다 싸놓고 차까지 대기시켜 놓았다가 뒤늦게 다른 진단명이 나왔다며 짐을 푸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AI가 환자의 상태를 모니터링한다고 하루에 만몇천원을 더 내야 했지만 심장이 멈췄을 때는 내가 뛰어가 간호사를 직접 호출해야 했다. 어머니는 내 관심의 공백과 의료 공백의 절묘한 조합으로 치료의 적절한 시기를 놓쳐 급성 신우신염, 연하곤란과 그로 인한 흡인성 폐렴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돌아가셨다. 2025년 크리스마스에 나는 빛이 아닌 암울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야 했다. 어머니가 생각 나서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으면 적어도 어머니는 편히 돌아가셨을 거라는 생각에서 벋어나지 지가 않는다. 그러면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콧줄 하게 내버려 두지 말라고 아들에게 미리 말해둬야지 하는 내 이기심을 꿀꺽 삼킨다. 저항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심경을 나도 온전히 느껴야 공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내게 크리스마스는 어머니를 살릴 수 있었던 결정적 시간을 놓친 미련의 시간이었고 내 삶에 있어서 가장 후회될 만큼 모진 말들을 어머니에게 쏟아 냈던 저주의 시간이었다. 콧줄 또는 L tube라 불리는 튜브를 어머니에게 삽입하도록 아무런 제지도 안 한 방관의 시간이었고 그 콧줄이 너무 괴로워 하루에 서너 번을 빼버리는 어머니와 그걸 못하게 하기 위해 손을 꽁꽁 묶어 놓는 폭력의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묶여 피가 안 통해 팔이 저린다는 어머니의 절규에 잠시라도 억제대를 풀어놓을라 치면 어느새 콧줄을 빼셨고 나는 모진 말을 뱉어내며 어머니 다그쳤다. 그 콧줄을 다시 삽입하기를 수십 번. 혈전 용해제를 드시는 어머니의 혈관벽은 엄청나게 얇아져 있었을 터인데 안의 혈관이 터지는 줄도 모르고 그 두꺼운 콧줄을 수십 번 빼고 수십 번 삽입했다.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그렇다고 사시는 것도 아니었는데 고통의 시간만 더 늘어났고 그 고통의 몇 달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어머니는 내게 억제대를 풀어달라고 하셨었다. 내게 콧줄 빼면 죽느냐고도 물어보셨다. 어머니는 결국 손목에 억제대를 하고 콧줄을 끼신 채로 돌아가셨다. 내게 그리 애원했는데 나는 자유함을 선물해 드리지 못했다. 나는 처음엔 그 폭력을 방관했고 그다음엔 그 폭력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나중엔 그 폭력을 믿었다. 그러면 사시는 줄 알고.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잠이 오지 않는 간병의 시간 한강의 채식 주의자를 읽고 있었다. 주인공이 그렇게 거부했던 콧줄.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어머니를 보면서도 그 폭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