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선포와 탄핵 국면에서 바라본 우리 모습
20세기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유럽의 역사를 ‘혁명의 시대’(1789-1848) ‘자본의 시대’(1848-1875), ‘제국의 시대’(1875-1914), 그리고 ‘극단의 시대’(20세기)로 분류한 뒤 각각의 시대를 제목으로 삼은 단행본을 냈습니다.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됐죠.
현금 우리 사회를 홉스봄의 표현처럼 ‘어떤 시대’로 구분한다면, 저는 ‘찌라시의 시대’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영어로 말한다면 ‘The Age of Disinformation’(허위 정보의 시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와 곧 이어진 탄핵 국면에서 정파성에 따른 숱한 찌라시를 우리는 목격했습니다. ‘8 대 0’ 인용부터 ‘4 대 4’ 기각까지, 헌재의 대통령 탄핵 선고에 대한 숱한 ‘확신에 찬 예측’이 나왔습니다. 자신의 정파성에만 충실한 주장이 팩트로 둔갑한 채 말입니다.
물론 그 어떤 예측도 팩트에 충실한 것은 없었다고 봅니다.
자신의 정파성이나 신념을 사실보다 우선에 두는 사람일수록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열었다가는 정파성이나 신념이 깨지니까!
‘나와 다른 판단을 헌재가 내렸을 때 불복하겠다’는 사람이 44%나 된다는 것(3월 31일~4월 2일에 벌인 여론조사기관 연합 조사 결과)도 그런 분위기를 웅변합니다.
하긴, 지난 150여 년 간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해 못 할 바도 아닙니다.
자생하지 못했던 근대로 인한 외세 강점, 그로 인한 국가의 분열(일본이 2차 대전 때 패전국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광복은 1945년 8월 15일에 절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겁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승전국에 강점당했던 국가들이 언제 광복됐는지를 생각해보시죠.), 통일을 명분으로 벌어진 동족상잔, 분단 고착 아래서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발생한 독재와 그에 따른 저항.
현금 우리 사회가 ‘찌라시의 시대’를 사는 이유는, 홉스봄의 시각을 따른다면, 여전히 우리가 ‘혁명의 시대와 극단의 시대 그 어딘가에서’ 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긴, 근대를 가장 먼저 자생적으로 이룬 유럽 제국(諸國)이 그토록 자랑스러운 ‘근대’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피를 필요로 했습니까? 역사 발전 과정에서 ‘급행’은 있어도 ‘건너뜀’은 없다고 봅니다. 유럽이 겪었던 그 고통스럽던 근대화 과정을 우리는 여전히 겪고 있는 것이겠지요. 우리 손으로 이룩한 근대는 아쉽지만 1945년 광복 이후에 시작된 것이니. 채 100년이 안 되는.
이제 몇 시간 후면 헌재의 선고가 나옵니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이 생물학에서는 더는 통용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개인이나 국가 발전 과정을 이해할 때는 여전히 유효함을 알기에, 지금 우리가 겪는 ‘찌라시의 시대’는 앞으로도 숱한 변형을 거치면서 살아남을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노력하면서 ‘찌라시의 시대’를 조기 졸업하기를 바랍니다.
증명되지 않은 신념이나 생각에 대한 오류 가능성을 열어두기.
증명되지 않은 사안에 대한 나와 남의 차이를 인정하기.
무엇보다 ‘각각의 정파성’은 과학이 절대로 아니며, ‘증명되지 않은, 종교와도 같은 신념일 뿐’이라는 것을 겸허하게 서로 받아들이기.
제가 제 스스로에게도 채찍하는 심정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설령 내 생각과 다른 결론을 헌재가 냈더라도, 우리 모두 ‘아쉬울지언정 승복하는 자세’를 가졌으면 합니다. 그것이 ‘바람직한 근대’에 우리 사회가 한발이라도 더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봅니다.
#찌라시의시대 #계엄 #탄핵 #헌재 #에릭홉스봄 #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