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깊은 감동과 울림을 주는 글도 만나고, 읽는 순간 경악할 정도로 충격을 주는 글도 봅니다.
1997년 10월 22일 자 조선일보 45면에 실렸던 이에리사 선생의 글은 후자였습니다. ‘나는 기술을 짓누르는 힘을 사랑한다’는 문장이 저에게 특히 충격이었습니다. 그가 말한 기술은 ‘과학 기술’이라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섬세함이나 기교 같은 뜻이겠지요.
왜 이 표현이 근 3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제 뇌리에 깊숙이 박혔을지요.
어린 시절 이후 저를 내내 짓누른 콤플렉스, 즉 ‘왜 조선은 외세에 그리도 무기력하게 강점을 당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이에리사 선생이 저와 공유했다는 착각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소년이로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 ‘형설지공’을 되뇌며 학문에 힘썼던 조선이 그리도 무기력했던 것은 ‘힘’을 기를 수 있는 학문, 수학이나 물리학과 그에 기반한 자연과학과 공학에서의 뒤처짐 때문이 아니었을지요.
K 문화가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다지만, 그 인기가 ‘피크(peak) 코리아’의 이면이나 아닐지 걱정하는 것은 제가 ‘극 꼰대’이기 때문일지요.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의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7/10/21/1997102170394.html
조선일보 어플리케이션을 깔지 않으신 분도 있을 듯하여, 기사 전문을 올립니다.
이에리사 ‘나의 신인 시절’
축구나 야구, 골프공은 윗부분을 때리면 아래로 튀긴다. 아래쪽을 때리면 위로 뜬다. 하지만 탁구공은 위를 때려야 더 높이, 더 힘차게 뻗어간다. 아래쪽을 깎아 치면 깔리듯이 날아간다. 나를 매혹시킨 것은 위를 때리는 탁구의 이 드라이브 타법이었다.
오빠의 라켓에 윗부분을 얻어맞은 탁구공이 테이블에 튀긴 뒤 나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던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드라이브는 나의 벗이 됐고 사라예보에선 최강이라던 중국과 일본 선수들을 줄줄이 무릎꿇린 비장의 칼
날이 됐다.
초등학교 3학년. 대전에 있던 우리 집과 밭 사이 공터에는 탁구대가 있어서 언니 오빠들이 공을 치며 놀곤 했다.
3남5녀중 7번째였던 나는 당시 탁구 선수였던 언니와 오빠를 졸졸 따라다니며 라켓을 잡을 기회를 노렸지만 탁구대 주변엔 얼씬도 못하게 했다.
결국 동네 아이들과 구슬치기를 해서 딴 구슬을 되팔아서 마련한 돈과 세뱃돈을 합쳐서 라켓을 샀고 밤새 벽에다 공을 튀기면서 기나긴 운명과 첫 만남을 가졌다.
아무리 기를 써도 탁구 선수이던 둘째 오빠를 이길 수는 없었다. 18점을 잡아 줘도 번번이 지곤 했다. 바짝 약이 올랐지만 남자를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 탁구 특활반에 들어갔지만 진짜 탁구를 배운 곳은 오빠가 다니던 대전중이었다. 대전중 탁구부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남자들의 탁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남자들과 스매싱을 교환했고 그들의 드라이브를 받았으니 처음부터 파워탁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었다. 커다란 폼으로 힘차게 때리는 드라이브를 내 것으로 만들 결심을 하게 된 시기였다.
여중 3학년이던 69년 겨울. 실업의 언니들과 국가대표까지도 꺾고 종합탁구대회 우승을 차지해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후 전무후무한 종합 탁구대회 7연패의 대기록을 만들었다.
73년 유고 사라예보에서 사상 첫 구기종목 우승이라는 영광을 얻은 것도 초등학교 시절 배우기 시작한 드라이브 덕분이었다. 나는 남자들의 전유물이라던 루프드라이브를 본격적으로 구사한 첫번째 여자선수였다.
스피드와 변칙은 나의 몫이 아니다. 나는 기술을 짓누르는 힘을 사랑한다. 어머니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름을 따서 나에게 에리사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나는 가장 남성적인 방법으로 여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