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지인 한 분이 카톡으로 시 한 편을 보내셨습니다.
빈틈
사람이 틈이 없으면 차가운 벽과 같단다
빈틈이 있어야
실바람과 햇볕이 조금씩 들어가
삶이 꽃과 식물들로 풍성해진단다
그 틈이 문이 되어
사람들이 들랑날랑한단다
작은 틈이라도 있어야
꽃길 진흙길 걸어온 사람들과도
어깨동무할 수 있단다
조그마한 틈마저 꽁꽁 막아버리면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버린단다
빈틈은 사람이 가진 향기란다
좋은 시라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저는 ‘반박거리’부터 떠올랐습니다.
‘빈틈’이 좋다고요? 법이나 상(商) 규약에서 틈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몰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시나요? 빈틈없는 인간이 어디 있다고 틈을 권하시나요? 오히려 틈을, 잘못된 것을 고쳐 나아가야지.
시인의 문학적 비유랄까 언어를 무시하고픈 것은 아니지만, 제가 ‘사회적 공감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돼서인지 시 감상이 영 편하지가 않았습니다.
-------------------------------
병아리 때 쫓기면 장닭이 돼도 쫓깁니다.
제게는 참 많은 콤플렉스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지적 능력에 대한 콤플렉스’입니다.
저는 84학번입니다. 340점 만점의 학력고사 세대. 어느 대학 동양사학과에 입학했지요.
대학에 입학하니 주변 과 수석 점수가 바로 알려지더군요.
동양사(정원 39명) 수석 316점, 서양사(정원 39명) 310점(내신 3등급이었다네요.), 고고미술사(정원 20명) 307점.
당시 제가 입학한 대학 법대 예상 커트라인이 315~317점이었습니다.(‘예상’이라고 쓴 이유는, 법대가 사실상 미달이 됐기 때문입니다. 270점 대도 붙었지요.) 경제학과 309점 1등급이었고요.
즉, 제가 입학한 과나 주변 과 98명 입학생 중 그 대학 법대를 ‘정상적으로’ 입학할 수 있는 친구는 단 1명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커트라인으로. 그 대학 경제학과로 낮추면 3명이었고요.(동양사 차석 2명이 309점 1등급)
국사학과에는 전국 7등으로 329점을 맞고 인문대 수석으로 들어온 친구가 있었습니다. 차석 점수는 알려지지 않았으니, 국사학과에서 그 대학 법대를 몇 명이나 갈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고요.
학교 다닐 때 방학임에도 도서관에 간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입학할 때 꼴찌였지만, 졸업할 때는 중간이라도 하자. 머리가 나쁜 탓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누군가 저를 이렇게 비판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 참 문제다. 학력고사 치른 지가 40년도 더 지났는데, 지금도 학력고사 이야기를 해? 그 뒤 노력하면 지적 능력이 역전될 수도 있는 거 아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복싱에서 황인이 헤비급 ‘통합 챔피언’ 하는 것 보셨나요? 100m 달리기에서 황인이 세계 1위를 차지할 수 있을까요? 농구에서, 중국이나 일본이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을까요?
타고난 것은 역전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지적이든 육체적이든.
상위 1%에는 평균적인 아이큐를 지닌 사람이 ‘이를 갈고 노력하면’ 들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한데 상위 0.01%(1만 명 중 1명)는 이야기가 다르지요.
제가 다닌 대학에서 그렇게 ‘지적으로 타고난 이’를 몇 봤습니다. 도저히 저 같은 범재는 따라잡을 수 없는...
제가 졸업한 고교에서 3년 내내 전체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는 1년 선배(83학번 학력고사 328점 맞음)는 300명 정도 뽑던 사법시험을 단 1년 3개월여 만에 붙더군요. 그 대학 법대생들도 보통 4년 정도 공부해야 붙던 시험이었는데.(일례로, 제 고교 동기와 1년 후배 역시 그 대학 법대에 붙은 뒤 공부한 지 4년을 약간 넘어 붙더군요.)
제가 그 대학에 입학한 직후 처음으로 대화를 나눴던 그 선배는 책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아서, 첫인상이 무척 안 좋았습니다. 지적 노력을 게을리한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는데.
한데 그런 분들도 틈은 당연히 있었습니다. 하긴 우리 때 학력고사 전체 수석이 3명 나왔는데, 그들 점수가 332점이었습니다. 그들도 8개의 ‘틈’을 보인 것이지요. 수재 중의 수재도 그럴진데, 저 같은 놈이 ‘빈틈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있을지요.
문학적 상상력을 무시하고픈 생각도 없고, 문학의 역할이 무엇인지 ‘아주 모른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여튼 요즘은 시나 소설 등 문학 읽기가 무척이나 힘듭니다. 공감 능력의 부족 탓 때문이겠지요.
저는 빈틈 없음이 좋습니다. 틈을 메우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인생 자체가 틈이 아니라, 구멍이 숭숭 뚫린 이들이, ‘나는 완벽해’ 생각하는 것만큼 지적으로 추한 게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참, 저는 틈이나 구멍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sink hole’인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