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쓰기’만 하면 기레기 소리 듣기 쉽습니다

서울대 이공계열 합격점이 연고대 공대보다 못하다?

by 신형준

삼류였지만 기자였습니다. 지금도 ‘기자’라고 하면 뭔가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사실을 추적하는 사람들. 저는 기자를 그렇게 정의합니다. 그렇기에, 사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기사에 대해서는 극도로 실망, 아니 혐오합니다.


아침, 어느 유력 중앙일간지의 기사를 보면서 개탄했습니다. 23학년도 대입에서, 서울대 이공계열의 정시 합격 점수가 연고대에 사상 처음으로 역전당했다는 기사입니다. 종로학원이 분석한 것을 단독으로 보도했습니다.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30918/121223201/1?ref=main


대학 입시를 담당하는 교육부 출입 기자가 쓴 것입니다. 한데, 교육부 출입 기자가 서울대 정시 모집 요강조차 제대로 읽지 않은 듯한 기사를 쓰면 어떡할까요?


지금까지 서울대 이공계열은 정시에서 한가지 대원칙이 있었습니다. 이과생이 선택하는 과탐에서 ‘과탐2’를 반드시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서울대 정시 성적은 다른 대학과 비교가 불가합니다.


우선, ‘과탐 2’가 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수능 과탐 과목은 총 8개 과목입니다. 물리 1과 물리 2, 화학 1과 화학 2, 생명과학 1과 생명과학 2, 지구과학 1 지구과학 2입니다. 이 중 두 과목을 택하게 돼 있습니다. 여기서 ‘2’자가 붙은 과목은 ‘1’에 비해 난이도가 훨씬 어렵습니다. 아주 무식하게 예를 든다면, 과탐1이 구구단을 외우는 것이라면, 과탐2는 미적분을 푸는 겁니다.(물론 그 정도 수준 차이는 아닙니다만, 예를 들다 보니 이리 됐습니다.)


‘과탐2’가 공부량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교육부의 ‘삼불정책’ 중 하나인 서열화 금지에 따라, ‘과목 간 서열을 따지는 것’은 엄격히 금지돼 있습니다. 즉, 성적을 백분위로 따질 때 물리2에서 100명 중 5등을 한 것이나, 지구과학1에서 100명 중 5등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친다는 겁니다.


이를 아주 단순무식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잘 생긴 사람=머리 좋고 공부 잘 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합시다.


공부하기도 어려운 물리2에는 소지섭 장동건 원빈 같은 사람이 100명이 있습니다. 과탐 과목 중 ‘이과의 지리학’이라고 불리는(단순 암기가 과탐 중 그나마 많다는 뜻입니다) 지구과학 1에는 신형준 신형준2 신형준3 같이 아주 못생긴 사람이 모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응시하겠습니까? 공부량이 많은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물리 2에는 배우 탤런트 등 잘 생긴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물리2를 택하는 게 바보이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수험생은 ‘과탐1’ 중 두 과목을 택하지 ‘과탐2’를 택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23학년도 과탐 과목별 응시생 수는 이렇습니다. 생명1 14만978명, 지구과학1 14만60명, 화학1 7만745명, 물리1 6만2309명, 생명2 4939명, 화학2 2841명, 지구과학2 2758명, 물리2 2628명.


가장 응시생이 많은 생명1이나 지구과학1 수험생에 비하면 물리2 선택자는 그것의 2%가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과탐 과목 선정에 대해 조언할 때 “가능하면 과탐2는 선택하지 마라”고 권합니다.


그럼에도 왜 수험생들이 과탐2를 선택할까요? 앞서도 말씀드렸듯, 서울대나 카이스트 등에서 “우리는 과탐1에서 두 과목을 선택한 수험생은 정시에서 뽑지 않겠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최소한 지난 10년 간 이어져 온 전통입니다.


그나마 물리1과 물리2 등 ‘동일 계열 과탐’ 두 과목을 공부한다면, 공부 분야가 비슷하니 나을 수도 있을 터입니다. 이 장면에서 서울대는 ‘얄짤’이 없습니다. ‘동일 과목 과탐 1-2 선택’마저 응시 불가 처리했습니다. 서울대 정시 응시생이라면, 서로 다른 과탐을, 그것도 과탐2를 낀 상태로 두 과목은 할 줄 아는 ‘소양’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물리1 물리2를 친다면 서울대 정시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물리1에 지학2를 치든, 지학1에 생명2를 치든 하라는 겁니다. 반면 연대나 고대 등은 ‘과탐2’에 대한 자격 제한이 없습니다.

자, 그럼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23학년도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과탐2 과목을 선택한 수험생 총원이 1만 3000명이 안 됩니다. 이 사람들만이 서울대 이공계열 정시를 지원할 ‘자격’이 있습니다. ‘풀(pool)’ 자체가 적은 겁니다.


게다가, 과탐2의 공부량이 많은 까닭에 이 과목 지원자들은 국어와 수학 등 다른 과목을 공부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줄어듭니다. 과탐1 지원자와 비교할 때, 다른 과목 점수 따기가 힘들어진다는 뜻입니다.


또한 과탐2에는 서울대와 카이스트를 노리고 들어오는 ‘수준 높은 수험생’이나, 그 과목 ‘덕후’(어떤 분야에 미친 사람이라는 뜻)가 많은 탓에 수능 시험 때 자칫 자기 페이스를 잃으면 해당 과목 등급이 3등급(백분위 상위 11~23% 이내) 이하로 뚝 떨어질 확률도 무척이나 높습니다.


이리되면, 과탐2를 택한 수험생은 더더욱 서울대를 지원하기 망설여집니다.


그래서 해마다 서울대 이공계열 정시 커트라인(평균이 아니라, 커트라인입니다)은 바닥을 면치 못합니다. 헬기를 타다 보면 ‘에어 포켓’이라고 해서 공기층이 희박한 곳에 이르면 헬기가 수직으로 하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울대 이공계열 정시 커트라인도 그렇습니다. 지원 자격을 갖춘 풀도 애초부터 적고, 과탐2 공부량도 많고, 게다가 과탐2에 우수한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과탐2 지원자들은 수능 성적을 망친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서울대 이공계 커트라인은 연고대 공대보다 못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해서, 2016학년도였나 정시에서는 중대 이과계열을 떨어진 친구가 서울대 수의대를 붙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다 무시하고, 무조건 ‘서울대 이공계 정시 합격선이 연고대 공대보다 낮아졌다, 의대로 몰려간 탓’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동아일보의 기사는 ‘100m 달리기와 100m 허들 달리기 성적을 단순 비교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달리기 코스에, 각종 장애물을 세워놓은 학교와, 그것이 전혀 없는 학교의 성적을 단순 비교해서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요.


저는 서울대나 연고대의 입시 결과 그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언론은 정확한 사실을 알려서 사람들에게 정보상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해당 기사는 정말로 실망스럽습니다.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터졌을 때 경찰은 “책상을 턱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경찰 발표 당시, 언론은 발표 내용을 그대로 받아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외 정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받아쓰기’는 어쩔 수 없는 겁니다.


하지만, 서울대 입시 요강이 버젓이 인터넷에 존재하는데, 그런 기초 자료조차 확인조차 않고 이런 식으로 단순 비교하는 건...


요즘 수험생들은 기성 언론의 입시 보도에 신뢰를 주지 않은 지가 꽤 오랩니다. 제가 봐도 부정확한 것이 많으니까요. 이런 불신이 기성세대에 대한 또 다른 불신으로 이어지지나 않을지, 그것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23학년도 서울대와 연고대 등의 입시 결과는 아래 자료를 보시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시대인재 학원이 만든 자료를 어느 수험생 사이트에서 다시 전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https://m.cafe.naver.com/ca-fe/web/cafes/10197921/articles/27390194?menuId=727&query=%EC%9E%85%EA%B2%B0&tc


추신


1. 최근 서울대 정시에는 ‘수험생들이 싫어할 특징’이 하나 더 추가됐습니다. 다른 대학 정시는 대부분 ‘수능 100%’인데 서울대는 정시에서도 고교 내신을 반영합니다.


그런데, 내신 성적을 수험생 본인조차 정확히 산출할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고교 때 이수한 과목이 지원한 학과와 얼마나 적합한가 등까지 따져서 내신 성적을 대학에서 자체로 다시 매기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물리학과를 지원한 친구라면 고교 물리 성적을 보겠다는 것이죠. 이런 사정 때문에, 지원자는 자신이 내신에서 몇 점을 맞을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서울대 정시에 상당수 수험생들이 투덜대는 이유는 여기에도 있습니다.


2. 서울대는 24학년도부터 이공계열에서 과탐1을 두 과목 응시해도 정시 지원이 가능하도록 처음으로 바꿨습니다. 다만, 과탐1만 두 과목 치면 가점이 없고, 과탐1과 과탐2를 한 과목씩 치면 3점 가점, 과탐2만으로 두 과목을 선택하면 5점 가점을 주기로 했습니다. 이 점수가 과연 어느 정도 큰 것일까요? 서울대는 표준점수에 과목별 가중치를 반영합니다. 국어 1, 수학 1.2, 과탐은 0.8입니다. 영어는 감점제로 2등급은 0.5점 감점, 3등급 아래부터는 등급당 2점 감점입니다. 여기서 3점 5점입니다. 과탐에서 3점 가점을 받는다면, 대략 국어로 치면 국어 문제 3점 혹은 4점짜리 한 문제 차이일 것입니다. 5점이라면 국어에서 2점짜리 한 문제와 3점짜리 한 문제를 더 맞은 모양이 될 것입니다. 수학이라면 5점을 가점받는다고 했을 때, 4점짜리 한 문제 정도를 더 맞은 것에 해당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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