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은 도로 경사도 등 여러 사정 때문에 ‘대회 기록’은 있어도, ‘세계 기록’은 없다는 게 육상계의 공식 입장이지만, 언론은 물론 육상계조차 세계 기록이라는 표현을 여전히 씁니다.)
마라톤 2시간 내 돌파 역시 꿈만은 아니게 됐습니다. 36초만 단축하면 되니까요.
그 며칠 전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 마라톤 경기. 한국 대표 중 최고로 잘 뛴 선수가 2시간 16분 58초를 했습니다. 마라톤에서 16분 이상 차이는 거리상으로는 5km가 훨씬 넘습니다. 이 기록은 1974년 동아마라톤 때 문흥주 선수가 세운 2시간 16분 15초보다도 늦습니다. 한국 마라톤의 현재가 50년 전보다도 못한 셈이지요.
하긴, 2012년 이후, ‘토종’ 한국 마라토너가 매년 세운 최고 기록 중 2시간 10분대 안에 드는 기록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오주한 선수는 케냐에서 귀화한 선수이므로 제외합니다. 한국 육상계가 애초부터 키웠던 선수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왜 이리 됐을까요? 베를린 영웅 손기정, 1950년 보스톤 마라톤에서 한국인 1~3위 석권 등 예전 일을 들먹이지 않겠습니다. 1992년 올림픽과 1996년 올림픽에서 한국은 마라톤에서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지 않았나요? 단 30년 만에 한국 마라톤은 1970년대 기록으로 돌아간 겁니다.
1990년대 한국 마라톤의 중흥은 정봉수라는 거인을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김완기 황영조 이봉주 김이용 등 한국 마라톤 기록 제조기들이 모두 코오롱에서 감독직을 했던 정봉수의 아이들입니다.
정 감독은 혹독한 훈련량은 물론, 단백질 위주로 식사를 하되 식사량까지 엄격히 제한하는 등 지독한 통제로 유명했습니다. 1990년대 마라톤 르네상스는 그래서 탄생했습니다. 1987년, 당시 코오롱 회장이던 이동찬 선생의 지원 아래 코오롱 마라톤팀이 창단된 뒤 이룬 업적은 형언하기 힘듭니다. 기록으로 볼까요?
1990년 김완기, 한국 최초 2시간 11분대 진입,
1992년 황영조, 2시간 8분대 최초 진입(한국 기록을 대번에 2분 15초 앞당긴 것)
1992년 올림픽 제패
1996년 올림픽 은
1998년 이봉주 2시간 7분대 최초 진입
1999년 김이용 2시간 7분대 재진입
이 모든 기록이 정봉수 감독팀 때 이뤄진 일입니다. 황영조, 이봉주, 김이용의 기록은 당시 세계 기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고요.
호사다마인가요? 황영조 선수가 부상과 기록 부진 등으로 96년 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뒤 은퇴했고, 혹독한 훈련과 규율을 견디지 못한 코오롱팀 선수들이 1999년 10월 즈음, 코오롱팀을 이탈합니다. 성실함의 대명사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이봉주 선수조차 이때 이탈합니다.
결국 정봉수 감독이 ‘내가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선수들의 태도에 학을 뗐는지, 이동찬 회장 역시 팀에 대한 애정을 줄이게 되죠.
그 결과, 한국 마라톤은 뒤로 뛰고 있습니다. ‘정봉수 키즈’였던 이봉주 김이용, 그리고 정봉수의 ‘마지막 제자’ 격인 지영준이 기록을 그나마 유지했지만, 이들이 떠난 뒤 한국 마라톤에서 2시간 10분 이내에 진입한 마라토너는 단 한 사람뿐입니다. 그것도 2011년에 세워진 것이지요.
이동찬 코오롱 회장과 함께 한국 마라톤 르네상스를 열었던 정봉수 감독은 2001년 7월 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