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절 학교를 다녔지만, 실력이나 인성에서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웅숭깊은 외우 이한상 선생(대전대 교수)이 책을 냈습니다. ‘팔수록 더 깊어지는 발굴 이야기’(책과함께 간)입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기고했던 고고학 관련 글을 모아 펴낸 것입니다.
저는 이한상 선생의 글을 평가할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중언부언한다면, ‘고고학에 관심을 가진 그 모든 이에게 고고학의 매력을 유물과 유적을 예로 들어서 쉽고도 재밌게 설명했다’는 게 이 책의 최대 강점일 듯합니다.
1971년 12월, 집 주변 배수로를 파다가 발굴돼 엿장수에게 팔렸지만, 유물임을 직감한 엿장수께서 도청에 전해줌으로써 세상에 드러난 국보 ‘전남 화순군 대곡리 팔주령(가지방울)’. 이 유물은 서기전 3세기, 한반도 청동기 후기의 문화양상을 웅변하는 유물로 평가받습니다.
출토된 신라 금관은 신라 왕들이 생전에 썼던 것을 무덤에 넣은 것일까요? 저자는 “아닐 것”이라고 말합니다. 근거는?
고고학자 최종규는 1990년대 초, ‘출토된 신라 금관이 데스마스크처럼 죽은 이의 얼굴 전체를 덮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라 금관은 실제로 썼다기보다는 장례 때 사용한 것’일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저자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근무하던 1990년대 후반, 신라 금관에 대한 농밀한 조사를 합니다. 저자는 금관을 머리에 쓰면 금관 장식으로 쓴 금판이 너무 얇아서 휘어지려고 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실제 모자처럼 쓰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겁니다. 어느 왕인들 ‘머리 장식이 한여름 소 00처럼 늘어진’ 금관을 쓰려고 할까요? 모양 빠지게.
금관 조각 무늬도 너무 엉성해서, 왕이 금관을 자세히만 살핀다면 ‘금관을 만든 이를 경이라도 칠 것’처럼 보였답니다.
저자는 결국 ‘금관은 살아 있을 때 실제로 썼다기보다는 장례용품으로써 망자의 생전 권력과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얼굴 위에 올린 상태로 묻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금관을 얼굴에 덮었던 이들 중에는 소년도 있었다는 점에서 왕만이 아니라, 왕의 직계 등이 금관을 부장품으로 쓸 수 있었다고도 지적합니다.
지금은 이 이론이 ‘정설’로 취급되지만, 최종규-이한상 두 분의 연구가 있기 전까지 대개 출토된 금관은 왕이 생전 사용하던 것을 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고학이나 고대 역사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일독 강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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