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시기와 방식, 개인이 오롯이 결정할 수 있기를
금년 들어 지인들의 부음을 너무 자주 접합니다.
어제(5년 3월 2일)는, 제가 신문사에 다닐 때 첫 데스크였던 분이 돌아가셔서 빈소를 차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망 소식을 이토록 자주 듣는 이유는, 제 주변 분들이 그만큼 늙으셨다는 뜻이겠지요. 물론, 저 역시 늙었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 우울함 속에서 오늘 아침, 외신을 살피는데 영국발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https://www.independent.co.uk/news/health/cancer-symptoms-ghosting-young-people-b2700127.html
제목을 굳이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암에 걸리면서 친구의 90%를 잃게 됐다. ’암 소외‘(cancer ghosting)로 인한 고립감의 실체 (‘I lost 90 per cent of my friends to my diagnosis’: The isolating reality of ‘cancer ghosting’)
젊은이들의 암 발병률 증가는 비단 영국의 문제만은 아닐 겁니다. 특히나 암 환우를 많이 경험하지 못한 젊은층에게서 ‘암으로 인해 친구나 주변인들과 암 환자가 멀어지게 되는 현상’(cancer ghosting)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하긴, 당연하겠지요. 동년배로서, 암 환자를 자주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도대체 내가 저 친구(암 환우)에게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해야 하나’ 당혹스러울 겁니다. 그러다 보면 말이나 행동에서 스스로를 제약하게 되고, 결국 연락도 뜸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암 환우가 싫어져서가 아니라.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현상이지만, 이를 ‘cancer ghosting’이라는 표현으로 조어(造語)한 것이지요. 물론 저는 이 단어를 오늘에서야 처음 접했습니다.
기사는 “이 같은 사회 현상에 대해, 사회 전반적인 대응과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도덕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내놓았습니다. 하긴, 뭐 별 뾰족한 수가 있으려고요.
기사를 다 읽고 든 생각. 기사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태어남은 내 의지만으로 된 것은 아니지만, 죽음만큼은 내 의지대로 시기와 방식을 결정할 수 있었으면. 아픈 이에게만 안락사가 허용되는 게 아니라(우리나라는 이 방식의 안락사조차 허용 안 됩니다. 연명 치료 거부 정도만 허용되지.) 설령 아프지 않더라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몇 번의 사회적 설득’을 기울인 뒤 그럼에도 생각을 바꾸는 게 불가능할 때는 ‘스스로 소풍을 마치는 것’이 허용됐으면. 소주 들이켠 뒤 취중에 밀폐된 공간에서 번개탄 피워서 떠나는 것, 참 서글프지 않나요?
우리 모두 죽음의 시기와 방식에 대해 냉정하게 되짚었으면 합니다.
이런 생각을 우울증이라고 단칼에 재단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일찍 떨어지는 잎도 있고, 늦게 떨어지는 잎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무는 해를 견뎌, 이듬해 잎과 꽃을 피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