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다>의 음악감독 ‘마리우스 드 브리스’는 자신에게 첫 아카데미 음악상 트로피를 안겨주었던 <라라랜드>를 회고할 때마다 이런 농담을 빼놓지 않을 것이다.
“라라랜드가 유명해진 건 음악 때문이 아니에요.
하루살이보다 짧았던 아카데미 작품상의 영광 때문이죠.”
2017년- 아카데미 작품상의 영광을 최단 타로 누렸던 비운의 영화 <라라랜드>. 당시 라라랜드의 히로인, ‘엠마 스톤’의 여우주연상 봉투가 잘못 전달되는 바람에 작품상 발표 1분 만에 <문라이트>로 정정되는 대굴욕을 당했던 사건, 기억하시는가. 100주년을 앞둔 아카데미 역사상, 단언컨대- 이보다 더한 참사는 없을 것이다...
<맨 인 블랙> 주인공 '윌 스미스'
라고 예측한 지 불과 5년 만에, 이 역대급 해프닝을 능가할 또 한 건의 참사가 터졌으니 그 주인공- 바로 ‘윌 스미스’ 되시겠다. 윌 스미스 하면 <맨 인 블랙>, <맨 인 블랙>하면 윌 스미스일 정도로 코미디계 한 획을 그은 ‘나는 (코믹 영화계의) 전설이다’- 윌 스미스.
그가 전설의 웃음기를 쫙 빼고 <킹 리차드>로 돌아온 것까진 좋았는데, 웃음기를 빼도 너무 뺀 게 문제였다. 제94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며 시상식 내내 주목받는 게 부담이었는지, 아니면 숨 막히는 가족 사랑을 과시하던 <킹 리차드> 속 캐릭터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한 탓인지- 시상자의 우스갯소리에 폭주하는 역대급 해프닝을 선보인 것.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재담꾼 ‘크리스 록’이 시상자로 등장해 (대부분의 코미디언들이 그러하듯) 참석자들 상대로 농담을 던지며 말문을 열었는데- 하비에르 바르뎀, 페넬로페 크루즈를 시작으로 부부동반 참석자들 약을 올리려던 그의 레이더 망에 ‘윌 스미스’ 부부가 딱 걸린 것이다.
<지. 아이. 제인> 주인공 '데미 무어'
삭발 머리로 걸 크러쉬 아우라를 풍기는 윌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를 향해 “조만간 <지. 아이. 제인 2>에서 보겠군요.”라는 아슬아슬한 농담을 날린 것. 데미 무어의 삭발 투혼으로 화제를 모았던 ‘지. 아이. 제인’을 삭발 여성에게 빗댄 것은 받아들이기에 따라 우스갯소리도, 정반대로 비수가 될 수도 있었는데- 제이다는 후자였던가 보다. 정색하는 아내를 대신해 연단에 오른 윌은 빛의 속도로 크리스 록 뺨에 '불꽃 싸다구'를 날렸고, 멘붕인 크리스를 향해 “내 아내 이름 입에 올리지 마!” 라며 사자후까지 날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분 남짓.
<알리> 주인공 '윌 스미스'
OMG.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펀치력을 선보인 건, 20년 전 영화 <알리> 때 갈고닦은 권투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주려는 그의 빅 픽쳐였을까. 그럴 리가. 그가 이렇게 격한 리액션을 보인 건 아내가 탈모로 고생한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아내를 사랑하는 갸륵한 그 마음, 이해 안 가는 바 아니지만- 덕분에 갑분싸가 된 장내 분위기는 남우주연상 발표 때까지도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신의 장난인지 뭔지, 이번에는 그가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연단에 오르게 됐다. 급발진 탓에 잔뜩 머쓱해진 윌 스미스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가 아니라 몸 푼 김에 입도 풀겠다는 의중인지, 한 편의 대서사시 같은 수상소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마 서먼과 존 트라블타가 시상대에 올라 <펄프 픽션> 속 커플댄스로 애써 살려놓은 분위기를, 장황한 연설로 재차 다운시켜버린 것이다. 소감은 이러했다.
자신에게 가족은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킹 리차드>에서 가장 공감 가는
부분도 그 점이었다고,
사랑을 지키려다 보니 가끔 미/친/짓도 한다고,
주최 측과 동료 배우들께 죄/송하다고-
그렇게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기나긴 소감 발표를 마치는가 싶더니, 그럼에도 내년 시상식 때 꼭 다시 초대해달라며 찡긋한다.
<킹 리차드> 주인공 '윌 스미스'
<킹 리차드>에서는 하의실종이었던 그가, 수상소감에서는 재미와 감동 모두 실종한 채 표표히 무대를 떠났다. 이를 지켜본 동료 배우들 반응은 어땠을까? 뒤이어 여우주연상 시상을 위해 등장한 ‘안소니 홉킨스’의 말을 들어보자.
윌 스미스가 제 할 말까지 다했는데
제가 무슨 멘트를 더 하겠습니까?
그냥 오늘 밤의 평화를 즐깁시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먹이는 대/배/우의 우아한 케이오 펀치에 박수가 터져 나온 것은 당연지사. 대배우의 뼈 때리는 일침은 비단 이 뿐만이 아니었다. 폭행사건 직후, 격분한 윌 스미스를 진정시키던 덴젤 워싱턴은 이런 조언을 남겼다고.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악마의 유혹에 빠진다
골든 글로브, 크리틱스 초이스에 이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휩쓸며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윌 스미스. 20년 지기 친구의 선 넘는 개그 덫에 빠져 끝없는 추락을 하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이렇게 한 순간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최후를 맞은 2022년의 윌 스미스 얼굴에는 2007년의 윌 스미스가 담겨 있다. 그의 2007년 작, <행복을 찾아서> 속 얼굴 말이다.
<행복을 찾아서> 주인공 '윌 스미스'
'이혼, 파산, 아이 양육'이라는 삼중고로도 모자라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던 ‘크리스 가드너’ 얼굴이 윌 얼굴에 오버랩돼 보이는 것은 왜일까.
할리우드 소식통에 따르면, 윌 스미스를 격분케 한 건 비단 아내의 탈모 트라우마만이 아니었다고. 동성애, 양성애, 폴리아모리를 넘나드는 아들, 딸의 연이은 커밍아웃과 이 못지않게 구설수에 올랐던 아내의 외도 (아들 친구와 한 차례 불륜 스캔들이 터진 바 있다) 사실이 삼중고, 아니 백팔중고가 되어 그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고 하니- 그가 시상식장에서 이성적인 대처를 못한 것에 정상 참작될 법도 하려나. 그러고 보니 크리스 가드너 얼굴만 있는 게 아니군.
윌 스미스의 파란만장한 가족애(哀:슬플 애)를 보고 있자니 가정을 사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킹 리차드> 속 리차드가 자연스레 오버랩되기도 하는 것이... 때린 사람도 맞은 사람도 누구 하나 감싸주기 힘든 유감스러운 밤이 그렇게 - 씁쓸하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