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02] 공부하는 삶
공부하는 삶 |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지음 | 이재한 옮김 | 유유 | 2013
차가운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어느 봄 학기였다. 한국 학생들이 대거 몰려있던 전공필수 수업엔 ‘C’도 있었다. 유학생 시절 C는 늘 도서관에서 자리를 지켰다. 항상 같은 자리에 바른 자세로 앉아 책을 대하던 그는, 다른 유학생들에 비해 영어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남다른 성실함으로 부족함을 메우는 듯했다. 하루는 수업 시작 전 한국 학생들과 서로 놀리고 낄낄 거리던 차에, 내가 던진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왜 그랬을까. 별로 친하지도 않던 그에게. 그리고 그날 밤 도서관에서 마주친 그는 내게 살천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공부하는 사람들 속 좁아요!” 낮에 뱉은 말을 민망하게 사과하고 돌아서며 느꼈던 허망함과 무력감은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가 단순히 속이 좁아서가 아니었다. 속 좁은 거로 치면 나도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다. 다만 살면서 한 번도 속 좁음을 – 인간 됨됨이를 – 자신이 “공부”하는 사람이란 이유로 당연시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공부하는 사람은 속이 좁아도 된다는 면제부는 누가 부여한 것일까? 과연 우리는 왜 공부하는가? 도대체, 공부하는 삶은 무엇일까? 의무 교육 12년, 대학교 및 대학원 8년. 도합 20년의 시간을 학생으로 지내고서도 공부하는 삶은 무엇인지 정의하고 답하기가 어렵다.
공부하는 사람은 속이 좁아도 된다는 면제부는 누가 부여한 것일까?
“공부하는 삶”(The Intellectual Life)”은 프랑스 가톨릭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Antonin-Gilbert Sertillanges)가 공부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법을 설명하기 위해 저술한 책이다.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쓰인 이 책이 프랑스는 물론 영미권에서 오랫동안 읽히고 지금까지 사랑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공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이 책을 시작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사람은 공부할 의무가 있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더 정확히 독자들은 저자의 저작 동기를, ‘신은 당신이 공부라는 지적 소명에 성실하게 응답하길 원하신다’라는 명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총 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눌 수 있다. 1부에선 지성인의 소명, 덕목, 삶의 구성 등 참된 공부를 위한 기초를 놓는다. 2부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기 전 공부를 위한 시간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 집중하고자 하는 영역은 무엇인지, 공부를 대하는 정신에 대해 다루고, 마지막 3부에선 읽고, 기억하고, 노트하면서 실질적으로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책 읽기가 어떻게 글쓰기로 지식이 재생산되는지, 또 책상 위의 공부가 어떻게 열매 맺고 다시금 삶으로 확장되는지 이야기하며 마무리한다.
세르티앙주는 공부는 “관념적인 것, 진리를 추구하는 것, 도덕적인 것, 선한 것과 참된 것, 실제적인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뻔한 이야기지만 그러기에 참된 공부는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입시와 취업, 학위를 위해서 매진하는 것과는 관련이 적다. 그가 말하는 공부하는 것, 지성인이 된다는 것은 신성한 소명을 따르는 길이며 마치 수도사처럼 오랜 시간 침묵 속에서 수행을 하며 한 인간으로서 전인격적으로 성숙함에 이르는 여정이다. 한 방향으로 오랜 순종을 요구하는 배움의 길에 중요한 자질은 고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고립이 아닌 자발적 고독으로서의 공부
고독은 시끄럽고 힘을 낭비하게 하고 배움에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관념적, 실제적 요소다. 하지만 지성인에게 요구되는 고독은 본질적으로 고립이 아니다. 배움에 집중하게 하는 고독은 지적 허영심을 채우는 관념적이기만 한 책 읽기에 우리를 함몰시키지 않고, 배움을 통해서 다른 누군가를 유익하게 하고자 하는 겸손함으로 이끄는 덕목이다. 고독함의 목적은 결국 함께하는 것이기에 배움의 길은 혼자가 아니라 벗들과 함께하는 교제, 나눔, 협력이 필수적이다.
진지한 토마스주의자의 조언은 깊이 있는 관념적 사유와 지극히 실제적인 지침으로 조화를 이룬다. 공부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거짓 없이 배움의 여정 끝에 당도하도록 애정 어린 권면을 한다. 하루 두 시간의 책상 앞에서의 공부가 빛이 나고 열매 맺기 위해서는 삶을 지탱하고 당기는 여러 다른 끈들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묵상하고 기도하는 끈, 참되고 선한 것을 추구하는 끈, 사랑하는 배우자와 아이들과 애정 어린 눈빛을 나누는 끈, 땀 흘리며 몸을 쓰는 끈, 벗님들과 담소를 나누는 끈, 쉼을 누리며 휴식하는 끈. 비록 균형을 잃어버리고 때론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할 만큼 버겁게 느껴지더라도 그중 어느 한 끈이라도 놓아버리게 된다면 참된 공부의 여정이 될 수 없다.
당신의 '속좁음'을 글을 쓰고 공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하지 말자
이 땅에 지식인들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소위 ‘속 좁은 사람들‘로 비치는 까닭은 – 나를 포함해서 - 아마도 그들의 배움이 삶의 여러 갈래와 맞닿아 있지 않은 여정으로서 오랜 시간 고립되어 왔기 때문은 아닐까? 사소하게 상처 입고 속 좁은 구석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허나, 당신의 속좁음을 글을 쓰고 공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하지 말자. '공부란 하늘과 땅을 사람이 연결하는 것'이라 했던 신영복 선생의 말까지 벽두 새해부터 들이밀지 않더라도, 당신과 내가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이유는 결국 인간답게 잘 살아내기 위함이 아닌가. 공부를 수단이 아니라 소명으로, 무엇보다 살아내는 삶으로 고민하는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