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셉 Jan 08. 2021

상처 받은 이들의 처절한 생존전략, 글쓰기

[서평03] 치유하는 글쓰기

치유하는 글쓰기 | 박미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


얼마 전 아내와 함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 (2002)를 다시 보았다. 이 영화는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Władysław Szpilman)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슈필만과 가족들의 평화로운 삶은 비참하게 무너진다.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게토에 갇히고 수용소로 끌려간다.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장면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는 갓난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질식시켜 버린 여인의 절규. 배고픔에 지친 한 노인은 바닥에 엎어진 피죽을 핥고, 독일군 병사들은 일말의 주저함 없이 사람들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다. 사람이 죽어 길에 나뒹굴고 불태워지는 장면보다 더 치욕스럽게 다가온 장면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연주를 시키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게 한 독인 병사들의 조롱이었다.


홀로코스트 박물관 (Holocaust Memorial Museum | Washington D.C)


이토록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기억을 슈필만은 왜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굳이 이런 고통을 끄집어내어 기록한 의도는 무엇일까? 워싱턴 D.C 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가면 전시관 한쪽 벽에 가스실에 벗어놓은 신발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이름 모르는 수많은 이들이 남겨놓은 그 신발들은 하나 같이 분명한 메시지를 준다.


“나를 잊지 말아요."


그렇다. 몸서리 칠 정도로 고통스러운 순간을 기억하는 것도 분명 괴로운 일이지만,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누군가에게 철저히 잊히는 것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오히려 완전히 부서져 버리기에, 써야 한다. 아픔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 그들의 생존전략이었다. 


글쓰기, 내면을 치유하는 응급처치법 내지 애처로운 인간들의 생존전략


홀로코스트나 식민 피지배, 전쟁과 같은 경험이 아니어도, 엄마 뱃속에서 떠나온 인간 중에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자들이 있을 리 만무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픔 없고 눈물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어딘가 깨지고 상처 나서 아프다. 작가 박미라는 상처가 크던 작던 인간 내면의 상처는 자아에 결핍을 남기고 손가락에 박힌 가시처럼 아프게 하니, 내면을 치유하는 응급처치법 내지 애처로운 인간들의 생존전략은 좀 배우고 살자고 권유한다. 그 처절한 살아남기가 글쓰기다. 그녀가 전하는 생존전략은 어렵지 않다. 발설하기다. 말하기도 좋고 글도 좋으니 날 것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우선이다. 양치질 안 한 입처럼 고약한 냄새 풍길까 봐 두려워말고 그냥 좀 내뿜어야 살 수 있으니 마음에 달린 마스크도 벗고, 안전장치 좀 풀어내라고 한다.


박미라가 전하는 치유하는 글쓰기 최고 전략은 '미친년 글쓰기'다.

"치유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미친년 글쓰기를 권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글을 쓰는 이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남성성과 여성성을 고루 가지고 있다. 이 점에 동의한다면, 성별과 상관없이 미친년 글쓰기가 필요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우리의 여성성은 어떤 식으로든 크고 작은 상처로 고통받고 있으며,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상처를 통해 이야기하기, 흉터를 감추지 않고 말하기, 자신이 미쳤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그것이 미친년 글쓰기이다." (치유하는 글쓰기, p154)


미쳐야만 쓸 수 있다


'미친년 글쓰기'의 핵심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허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말의 앞뒤가 맞고, 또 글의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글을 읽는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에 갇힌 글쓰기가 아니라,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적는 것이다. 미쳐야만 쓸 수 있다. 물론 발설하고 털어놓되 자신을 깊이 보고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대상을 찾으라는 실질적인 조언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나, 글쓰기 자체가 상담과정이며 치유의 여정이기에 온 몸으로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솔직하게 담아내는 않고서는 진정한 치유는 기대하기 어렵다. 미친 사람처럼 솔직한 글쓰기 끝에야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반짝이는 나를 볼 수 있다.


유학 초기에 아내는 페이스북 담벼락에 이런 글을 적었다.

“이 아름다운 가을의 정경이 언제쯤 다시 내 마음으로 누려질까. 최면 걸 듯 눈물 쏙 빠지게 한번 웃어보자.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땐 미처 몰랐다. 아내가 자신을 지지해 줄 누군가가 마냥 고팠던 순간이었던 것을. 아내는 '미친년'이 되어 미친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이 역시 아내의 처절한 생존전략이었다.


페이스북처럼 아는 사람들이 보는 공간에 차마 한 번씩 글 보따리를 풀어놓을 용기가 없어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논리가 아닌 심장 소리만 따라 글을 쓰고 싶으면 개인 서랍장에만 간직하면 그만 일 텐데, 기어이 작가 신청을 했다. 남의 글을 들여다보고 싶고 또 누군가 나를 들여다 봐줬으면 하는 심리는 마냥 병적이고 유아기적 행동이 아닌가 자책하게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마음 바닥까지 한번 박박 긁어서 이랬고 저랬고 미친놈처럼 주저리주저리 글을 쓰고 나면 개운할 것 같지만, 이내 자판을 두드리다 멈추기 일쑤다.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누군가는 냉소적으로 반응할 거야.’


하지만 저자는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내가 글을 못하고 주저하고 있다면, 그건 아직까지 누군가의 글과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있다고 일갈한다. 사람들이 수없이 읽고,  잊어버리는 많은 글들은 단순히 말의 조합이 아니다. 같이 호흡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에 보내는 신호(signal)이자 애달픈 몸짓인 것이다. '나를 잊지 말아요.' 글쓰기를 통해 그들은, 아니 누구보다 나는 인정받고 치유받고 싶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심 없는 지지자들의 진심 어린 격려와 칭찬이 고프다. 오늘은 브런치 피드에 올라온 글들에 최대한 라이킷을 많이 누를 예정이다. 글쓰기가 상처 받은 오늘 하루를 살아낸 나와 그들의 처절한 생존전략이었음을 누구보다  알기에.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속좁음'을 '공부'로 정당화할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