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04]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지음 | 송태욱 옮김 | 자음과 모음 | 2012
10년 전 처음 미국에 유학 와서 수업을 쫓아갈 때, 모든 과목이 곤욕스러웠다. 그중에 특히 교수님 한분에 대여섯 학생들만 참여하는 세미나 수업은 피를 말렸다. 세미나 수업 한 과목당 매주 100에서 150쪽 정도 읽어가야 한다면, 한 장(chapter)에도 온갖 담론들이 잡탕 비빔밥처럼 모두 뒤섞여 있다. 플라톤을 필두로 한 고대 철학과 근대 철학, 구조주의 철학, 후기 구조주의와 식민지 담론까지. 한 텍스트와 철학, 철학과 콘텍스트가 엮이는 지점은 대개 굵지 않고 모호하게 붙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개념과 사상들을 두루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희미하게 내용이 포착됐다, 그마저 증발하기 일수다. 여전히 “모든 것의 모든 것”은 고사하고 모든 것의 개뿔(?)만큼도 모르면서, 교수님과 학우들 이야기에 끄덕이고 어색하게 웃고, 한마디 거드는 생존기술만 늘어간다. 수업을 마치면 '나'만 이렇게 바보 쪼다 인가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한마디. "통 알아먹을 수가 없네!" 그렇게 열심히 떠들어 대던 친구들도 사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2021년 1월부터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되면서, 알 수 없는 초조함과 불안함이 급습한다. 무언가 다시 순수하게 읽고 쓰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된 작가 신청이었다. 작가 신청에 적어낸 글쓰기 계획은 일단 매주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편의 서평을 10주 동안 쓰는 것이었다. 첫 주부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글을 안 써서가 아니다. 예정보다 글을 더 쓰기 시작했다. 수면 패턴이 깨졌다. 이건 글을 쓰지 않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은 징조다. 일필휘지로 글을 쓸 수 있는 글감이 많거나 강렬한 영감이 있어서도 아니다. 여전히 읽고 쓰는 것 자체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위치 에너지를 높이는 과정이 아니라, 서둘러 풀어내고자 하는 허세 가득한 욕망이 꿈틀 거린다. 발행 글 수를 하루속히 두 자리로 올려야 한다. 대체 왜!? 이렇게 초조한 마음으로는 지속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읽기와 쓰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숱하게 경험했음에도 말이다. 배움이 폭발할 수 있는 뇌관은 물에 젖어 축축한데, 라이터를 빨리, 멋지게 켜는 잡기는 늘지 않아 초조해하는 꼴이다.
팔루스적 향락, '모든 것에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믿음
일본인 철학자인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닷새 밤에 걸친 인문사회과학 콘서트를 연다. 저자는 시종일관 텍스트를 읽고, 쓰는 것이 인류 역사 혁명의 닻이자 추진 동력임을 확신 있게 논증한다. 첫째 장에서는 얄팍하게 ‘모든 것에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믿음을 팔루스적 향락이라며 비판한다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사상, 비평, 학문, 지식이나 정보를 둘러싼 이런 분야에서는 두 가지의 전형적인 형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쪽을 '비평가'라고 부르고 다른 한쪽을 '전문가'라고 부릅니다. 현재 대부분의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적인 지식을, 그것을 위에서 강림한 것 같은 그런 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 무엇에 대해서도 재치 있는 코멘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매달립니다. 결국은 둘 다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환상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이 말하는 것처럼 거기에는 '향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라캉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가장 '비참한' 향락인 '팔루스 Pallus적' 향락이 말이지요. 다시 말해 자신을 하나의 '우뚝 솟은 전체'의 모습으로 제시하려는 향락입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p24)
읽지 않으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저자는 니체를 인용해 많은 지식인들이 “늘 한마디 던질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으므로 진정한 생산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라고 꼬집는다. 무엇보다 책을 읽고 쓴다는 것은 일종의 광기를 내포한 위험한 일임을 초반에 언급함으로 자연스레 저자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읽기와 혁명의 관계 논증을 위한 기초를 다진다.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라고. 우리 삶이 무기력하고 체제 변혁적인 힘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반복해서 읽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읽지 않으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 장과 셋째 장은 각각 루터와 무함마드를 기독교와 이슬람을 대표하는 혁명가로 소개하는데 할애한다. 저자는 루터를 종교인이 아니라, 문학가이자 혁명가로 정의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라 읽어야 한다고 보고, 그 혁명의 시작을 성서 ‘읽기’로 본다. 우리 삶의 크고 작은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나고, 문학을 잃어버린 순간 혁명은 죽는다. 무함마드 역시 어머니 꾸란을 읽고 씀으로 이슬람을 개혁했다고 주장한다. 읽는다는 것은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는 일”이다. 반복해서 읽는 우리 자신은 이전과 같을 수가 없다. 넷째 장에서는 근대를 도래하게 한 중세 해석자 혁명을 소개하며 텍스트의 의미를 확장하고 마지막 장에서는 문학의 근거 없는 종말을 고하며, 기도하는 지식인들의 오만한 손을 풀던지 잘라버리라고 비웃는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람들은 여전히 텍스트를 읽고, 번역하고, 쓰면서 세상을 변혁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평소 그를 불편하게 했던 몇 가지 문제들에 응답하고자 했다. 모든 것에 쉽게 답을 주려는 지식인들의 강박관념에 제동을 걸고, 역사 속에서 혁명이 폭력에 의해 지탱되었다는 오해와 문학의 효용가치가 다했다는 일부 주장에 반박하는 일이다. 복잡하고 거대한 담론들이기에 자칫 위축되고 흐름을 놓치기 쉬울 수 있는데 글을 풀어내고 논거를 제시하는 형식이 딱딱하지 않아 몰입도를 높인다. 혁명이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는 밀도 높은 주장과, 낮은 식자율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은 텍스트 자체의 힘을 뒷받침하는 통계자료들은 저자가 얼마나 치밀하고 성실한 학자인지 가늠하게 한다.
하지만, 그 역시 한 권의 책으로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방대하게 언급되는 철학자들과 문학가, 역사와 사회에 대한 언급은 그 역시 “모든 것에 모든 것”을 말하고 알려주고자 하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또한 텍스트가 혁명의 원천임을 밝히는 것과 별개로 텍스트의 본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아감벤 비판은 적절한 것인지, 종종 자신만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발언은 조금 불편하다. 또한 저자가 빈번히 깔아뭉개는 나치에 대한 비판에 비해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괜스레 당황스럽다
초조해하는 것은 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다분히 옳다. 어느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서둘러 말하고 쓰지 못해 불안해하는 이들을 향해, 프란츠 카프카를 인용해 여러 차례 선언한다. “초조해하는 것은 죄다.” 무엇보다 읽고 쓰는 것에 대한 염려와 현실적 고민에 눌려 읽기와 쓰기의 참된 의미를 잃고 표류하는 독자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핀다. 시종일관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말은 이 한마디로 압축된다.
“몇 번이나 반복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납니다.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혁명은 거기에서만 일어납니다.” (p 152)
우리 시대에 '혁명'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생겨나는가. 읽고 쓰는 나에게 혁명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막연하기만 하다. 그러나 오늘도 이 믿음 하나로 읽고 쓴다. 초조함에 젖어버린 배움의 뇌관은 느리더라도 성실하게 읽고 쓸 때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말려질 때가 올 것이다. 비록 언제인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작은 불꽃에도 혁명적 굉음을 내며 우리 삶을 전복시키고 새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읽고 쓰는 그대들이여. 초조해 말자. 그런 중죄가 없다.
"그저 매일 쓰고 있는 힘껏 읽어라.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 레이 브래드버리
(Just write every day of your life. Read intensely. Then see what happens - Ray Bradb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