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도 똥을 싸야 한다.
며칠 전, 인천에서 함께 근무하고 있는 동기들을 만났다. 교대는 모두 초등교육학과 전공이지만, 그 안에서도 과목별로 세부 전공이 나뉜다. 초등교육학과, 그 안에서 미술학과 졸업생인 내 동기들은 대충 60명 정도. 그중에서, 임용을 인천으로 본 사람들은 꼴랑 4명이었다. 제 고향으로 시험을 친 친구도 있고, 서울로 시험을 친 친구들, 경기도로 시험을 친 친구들. 그 종류가 참 다양하다. 하지만 경인교대, 경기도와 인천을 근거지로 한 대학교 치고는 꽤 낮은 비율의 사람들만 인천을 쳤으니, '꼴랑 우리 4명'은 1년에 4번씩 꼭 꼭 뭉치는 친구들이 되었다.
자연히, 우리끼리 만나면 여러 동기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걔 이번에 책 냈더라?"
"개는 교육방송하던데?"
"누구는 어디에 집 샀다더라."
"누구는 유학 준비하더니, 대학원 합격했다더라. 다음 달 출국이래."
"아, 맞다. 걔 교직 관뒀더라. 그동안 준비했던 사업 한다고."
나는?
작년에 애 키웠고, 올해는 복직한 아주 흔한 교사. 책을 쓴 일도 없고 교육방송에서 강의할 일도 없고 유튜브에 교사 브이로그 올리는 일도 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언제 다들 그렇게 많은 것을 이뤘고, 또 이뤄나가는지. 어쩌면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십분 쪼개고 활용해서 만족스러운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는지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그들의 대단함을 생각했다. 결국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줄기처럼, 생각은 이렇게 종결된다. 나만 여기 그대로 있었구나.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더니, 내 배가 무진장 아파왔다. 동시에 가슴에 무언가가 불타올랐다. 마음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그래. 이건 질투다. 늘 감추기 급급했던 감정이지만 왠지 그날은 동기들 앞에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싶었다. 얘기해도 될 것 같았다. 남편은 그런 얘기 사람 잘 골라가며 하라지만, 그날 내 촉이 괜찮다고 했다.
"아, 부럽다. 부러워서 화가 나. 나는 그냥 애 키우는 아줌만데, 걔네는 그렇게 산다니까 나 너무 아무것도 안 한 거 같아서 속상하다? 에이, 다들 더 잘 살아버려 그냥!" 하면서 하하하 웃어버렸다. 친구들도 늘 감정을 숨기고 살기 급급했던 내가 터놓고 이야기하니 그게 또 웃기는지 크게 웃는다. 이 통쾌함이란. 이토록 시원할 수가!
질투라는 게 웃기다. 아니, 감정이란 게 참 웃기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드러내지 않고 마음에 쌓아두다 보면, 그 자리에 그대로 삭아서 진한 녹물을 남기는 것 같다. 사랑도 그렇고, 노여움도 그렇고, 안타까움도 그러니, 질투는 더더욱 그러할 수밖에.
스스로에게 묻는다. 남을 부러워하고, 남이 이룬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 뭐 그리 나쁘니? 왜 질투는 감춰야만 하니? 감정을 드러내는 게 유치한 거니? 왜 감정을 통제하는 게 성숙한 거니? 성숙하다는 건, 감정을 행동으로 잘 녹여내는 것 아니겠니?
질투를 향한 내 의문은 이렇게 결론지어졌다.
건강하게 드러내자. 좋은 용어를 사용해서, 질투일지언정 예쁘게 포장해서 표현해보자. 너, 잘해서 내가 부럽다고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리자. 그러니, 앞으로 더, 더 잘해서 성공해버리라고! 그렇게 질투 덮은 덕담을 하자고.
감정도 똥을 싸야 하는 것 같다. 음, 감정의 똥을 싼다니. 조금 더러운 표현이지만, 2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애엄마이며 9살짜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에게는 이보다 편한 단어가 없다. 고작 똥 수준인 생활이지만, 정말 마음에 쏙 드는 표현을 오랜만에 찾은 것 같다. 감정의 똥 싸기.
나는 그날, 친구들 앞에서 쾌변 제대로 했다. 1년 동안 아이를 키우며, SNS를 통해 어렴풋이 느끼던 감정을 정렬하고, 질투로 명명하고, 질투한다고 외치니 절로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나는 다시 한번 내 마음의 결들을 살핀다. 어떤 감정이 해묵어 있는지, 새롭게 생겨나는지.
그리고 또 깨닫고, 고백하고, 다짐한다.
나는 진실로 질투쟁이였고, 질투쟁이일 것이라고. 그리하여 앞으로 건강하게 질투해보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