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사랑일 뿐이다.
"선생님! 이거 엄마, 아빠가 뺏어 먹으면 어떻게 해요?"
내가 집에 가서 먹으라고 과자를 나눠주자 한 아이가 물어본다.
"안 뺏어 드실 거야."
"그래도, 혹시나 모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나도 모르게 피식, 실소가 나온다. 다른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눠주며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걱정 마. 부모님은 주면 더 주고 싶어 하지 너희 것 뺏을 생각 없으실 걸."
그렇다. 부모가 되어보니 알겠다. 항상 더 주지 못해 조급하다. 충분히 주었음에도, 이미 다 퍼주어서 마른 우물 바닥에 있는 흙까지 맨손으로 긁어 담아 주고 싶다.
과연 아이를 낳기 전에는 무어라 말했을까. 부모님을 무슨 도둑으로 만드냐며, 부모를 의심하는 그 아이의 마음을 자식의 입장에서 타박했으려나.
아이가 돌 쯤 지났을 때, 우연히 남편과 저녁을 먹다가 나눈 대화가 있다.
"여보, 나는 내가 아이를 키운 노력을 희생이라고 부르는 게 싫어."
희생. 그래, 희생. 다 큰 자식은 부모가 보낸 수십 년의 시간을 희생이라고 부르고는 했다. 나 역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부모님이 나와 동생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며 자랐다.
부모 각자가 보여주는 모습은 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자유롭게 시간을 쓰지 못하는 것, 늘 우선순위에 가족과 자식을 두고 산다는 것은 모든 부모가 가진 공통분모임이 틀림없다. 물론 이런 나의 수고를 먼저 희생이라고 치하해준다면 딱히 나쁠 건 없겠다. 내 아이의 마음에 겸손이란 것이 무럭무럭 자랐다는 증거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내 딸이 나의 노력과 시간을 희생이라고 부른다면 감히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그것은 결단코 희생이 아니었다고. 날것 그대로의 사랑이었다고. 내가 선택한 것이며, 그 선택의 결과가 너여서, 오로지 너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이었다고. 그러니, 희생이란 말로 '나'를 '버린'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오늘 갑자기 동생이 자기가 일하는 병원에 와서 비타민 D주사를 맞으란다. 형부도 놔달라니까, 이건 엉덩이 주사라고, 언니 엉덩이는 볼 수 있어도 형부 엉덩이는 못 보겠다고. 한바탕 웃은 뒤, 그게 어디에 좋냐니까 면역력 보강에 도움이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참나. 누가 동생에게 시켰는지 안 봐도 비디오다.
요즘 매번 위장약을 먹어야 할 만큼 소화력이 떨어지고,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를 낳은 뒤 평생 앓아본 적 없는 다래끼를 벌써 몇 번쯤 겪어본 내가 안쓰러울 사람은 단 하나다.
우리 엄마.
아아, 평생을 주었어도 우리 엄마는 또 마른 우물 바닥의 흙을 성실하게 퍼 담아 나에게 주려고만 한다. 물이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듯, 부모의 사랑도 제가 생각한 옳은 방향으로 흘러 간다. 아이는 매 순간 부서질까 두렵고, 그래서 부드럽게 한없이 보듬고 싶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내 아이가, 우리 엄마에게는 내가 그러하다.
글쎄, 부서지기에는 무척 단단하게 커 버린 나지만 엄마의 마음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당히 동생에게 엉덩이를 까보이고, 엄마의 마음이 담긴 주사나 한 방 맞아야겠다.
아린 주사 바늘 끝으로, 희생이 아닌 사랑이 흘러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