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 대한 기억과 후회
“저 년이 약을 처먹었네”
나지막이 혼잣말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아 씨….”
결국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역겨운 약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을 만큼
머리는 어지럽고 울렁거리는 속은
다 뒤집어 꺼내버리고 싶었다.
어젯밤 마지막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적은 몇 장의 종이를 손을 뻗어 감췄다.
죽고 싶었던 게 맞았을까?
구구절절 적은 글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죽겠다고 결심한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매일 술에 취해 잠드는 아빠와
아무것도 모르는 7살 어린 남동생,
평상시에 애증에 관계인 할머니
할머니의 거친 입에 질세라
사춘기에 나는 바락바락 대들었었다.
아침 머리맡에 까인
수많은 정체 모를 약봉지를 본 할머니는
그날 일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잘하던 욕도 꾸중도 없었다.
할머니는 며칠 동안 누워만 있는
나에게 죽을 끓여 가져오셨다.
“아야 묵어봐라. 암 것도 안 먹으면 어쩐 데”
“아 치워. 안 먹어 짜증 나 좀 놔둬!”
식어버린 죽을 치우고는
할머니는 컵라면을 사 오셨다.
“아야 이것 잠 묵어봐라. 학생들이 요거를 잘 묵는단디..”
“아 냄새나 진짜 짜증 나 안 먹는다 했잖아!”
속이 울렁거려 넘길 수 없었던 탓에
도리어 짜증만 냈었다.
결국,, 퉁퉁 불어버린 컵라면.
가끔 그날을 떠올릴 때면 할머니가
사 오신 불어버린 컵라면이 떠오른다.
그냥 먹는 시늉이라도 했다면
이렇게 후회로 남지는 않았을 텐데….
그날로부터 20년이 지났다.
그날 할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나가셨던 할머니.
매일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
시간이 흘러 생각해보니
술로 매일을 사는 시각장애인 아들,
사춘기 손녀와 어린 손주까지
삶이 힘들어 놓고 싶었던 사람은 할머니가 아니었을까?
내가 힘들어서 미처 알지 못했다.
내 주변에 가족들도 힘들었단 사실을 말이다.
힘든 상황에 놓이면 사람들은 회피하고 싶어 한다.
나도 그랬다.
엄마가 집을 나갔다.
남동생은 7살 나는 14살 때 일이다.
그 이후 부모님의 이혼으로
언니들은 엄마와 나와 남동생은 아빠와 살게 되었다.
엄마가 집을 나가고 며칠 뒤
아무것도 모르는 남동생은
엄마가 꿈에 식혜를 만들어 줬다고
먹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캔 식혜를 사 와서 그릇에 담아주었다.
“ 치~ 엄마가 만들어 주는 게 맛있는데….”
차마 이제는 엄마가 오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원하지 않은 삶이 찾아왔다.
시간이 갈수록 더 상황은 나빠졌다.
집 전화기가 매번 바뀌었다.
밤이면 술에 취해 들어와
집안 살림을 부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는 게 일상이었다.
듣기 싫어 베개로 귀를 틀어막아도 소용없었다.
그 불안함 답답함 원망스러움
모든 감정이 소용돌이치면
당장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내 현실이 싫어서 도망가면
나는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밤이든 새벽이든 친구 집으로 갔다.
내 사정을 아는 유일한 친구 집이 내 피난처였다
아무 일도 없는 듯 친구와
수다를 떨며 두려움도 걱정도 떨쳐내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기력함을 느낄 때면
혼자 그렇게 도망치기 바빴다.
고등학교 수능을 마치고
시골집을 떠나 언니들이 사는 곳으로 왔다.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핑계로
졸업식도 가지 못했다.
아니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20살이 된 나는
그렇게 집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