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 이쯤에서 미쳐도 되겠습니까

차량수사 일지

by 비읍비읍

평범한 어느날 무표정한 얼굴로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게시물에서 손이 멈췄다.


1111, 2222, 3333…
똑같은 숫자로만 구성된 자동차 번호판을 직접 찍었다며 올린 게시물이었다.


‘이걸 왜 모으지?’
‘이거… 나도 해보고 싶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 번 들어온 생각은 이상하게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진짜 모아볼까?’


사실 이렇게 특정 자동차 번호판을 모아보겠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는 한가지 숫자로 쭉 밀어버린 자동차 번호판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 남의 자동차 번호를 굳이 쳐다보거나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끝까지 간다'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다. 이 영화에서 교통경찰관으로 나온 박보검이 뻉소니 사건 cctv 영상을 보면서 뺑소니 차량의 번호를 추론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차량번호를 유심히 보다보면 경찰의 수사에 도움이 되는 뜬금없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런것들을 다 차치하더라도 지나가는 사물에 관심을 갖는다는 행위가 어떠한 의미가 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에 이 맹목적인 행위를 시작하게 되었다.


적극적으로 번호판을 모으겠다며 전국을 돌아다닐수는 없으니, 관심을 가지고 번호판을 보고 다닌다면 언젠가는 다 모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날 오후 여의도에서 강남역으로 택시를 타고가는 중에 이벤트가 발생했다.


차가 막히던 그 길, 나는 문득 택시 뒷차를 흘깃 바라봤다. 평소 같으면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을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뭔가 끌리듯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인생 첫 번째 로얄넘버를 마주했다.


ChatGPT Image 2025년 5월 29일 오후 03_48_55.png 안녕하세요 구구구구입니다.


9999. 그것도 마이바흐였다.

“와… 대체 뭐야, 저 차…”
순간 심장이 뛰었다. 차보다도 번호판 때문이었다.

‘진짜 이런 번호가 실제로 붙어있는 차가 있구나.’
‘그리고 내가 그걸 지금 눈으로 봤다.’


나는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망설임도 없었고, 부끄러움도 없었다. 오히려 어떤 확신이 내 손끝에 있었다.


‘이건 기록돼야 해.’
‘이건 수집의 시작이야.’


그 자리에서 나는 혼잣말을 했다.
“그래. 1111부터 9999까지 모아보자. 어차피 남들한테 보여줄 것도 없고, 블로그나 써야겠다. 뉴스타파나 그것이 알고싶다처럼 일종의 탐사 블로그를 작성해보는거야!”


1111 부터 9999까지 총 9개 중 벌써 한개를 모았다는 사실에 상당히 고무되었다. 이런 번호판을 한가지 숫자로 구성된 스트레이트 번호판이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내맘대로). 그날 이후 지나가는 차들의 번호판을 유심히 보고 다녔다. 스트레이트가 아닌 차를 볼때는 '아깝다'라는 혼잣말을 할 정도로 이 행위에 푹 빠져있었다.


하지만 곧, 이건 단순한 수집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이건 내가 일상에서 얼마나 관찰하고 있는가에 대한 테스트였다.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쓸데없는 것에 미쳐볼 수 있는가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차 번호판을 모으는게 무슨 의미냐고 누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려고 준비까지 했다.(아무도 물어보진 않았다)


“사람은 원래 의미 없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잖아요?”


예상 답변을 준비하고나니 마음에 쏙 들었다. 내가 하는 일이 쓸데없을수록, 오히려 더 나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번호판 수집 같은 거에 미치는 게 세상에 해는 아니니, 이쯤에서 미쳐도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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