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 집착이 철학을 만들었다.

숫자에 홀리다.

by 비읍비읍

10월 3일. 개천절.
이날은 평소처럼 골프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전과 달라진 건 딱 하나있었다. 나는 이미 9999 마이바흐를 목격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도로 위의 관찰자가 되었다. 운전 중에도, 보행 중에도, 택시를 타고 있어도 내 시선은 늘 앞차의 번호판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흰색 BMW 한 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ChatGPT Image 2025년 5월 29일 오후 03_53_37.png 부릉부릉 2222 지나갑니다.


2222.발견!


“이건 너무 좋은데?”
그 순간 내 안의 수집본능이 발동했다.

내적 친밀감을 느낀 나는 아무도 모르는 소규모 추격전을 통해 그 차 뒤에 바짝 붙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척 아주 자연스럽게.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을 꺼냈고, 차 안에서 슬쩍 각도를 맞춰 셔터를 눌렀다.


찰칵.
“됐어. 벌써 두 번째야.”


마치 보석함에 하나를 추가한 기분이었다. 게임에서 퀘스트를 하나 클리어한 기분도 들었다. '이 정도 속도면 이번 달 안에 끝날지도?' 속으로 혼잣말을 하며, 괜히 고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후 지나가는 차마다 번호판을 뒤지듯 쳐다보았지만 더이상 찾을수가 없었다. 하긴 한자리 숫자로만 구성된 번호판이 왠지 로열넘버라 흔치 않을텐데 너무 빨리 2222와 9999를 얻은것 같은 생각이 들어 좌절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4개월이 지나갔고 아주 추운 2월 어느날 또 한 대를 발견했다.
이번엔 선정릉역 근처에 있는 업체 미팅을 가는 길이었다. 날이 매우 추웠고 동행자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편의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왠지 고급차량으로 보이는 차들이 좁은 길을 나가지 못해서 극심한 정체에 빠져있었다. 그 중에 흰색 벤츠 벤이 있길래, 저 차는 연예인이 타고 있으려나?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흰색 벤츠 벤은 차번호가 뭘까? 하고 가까이가서 번호판을 봤는데 그 번호를 발견했다.


ChatGPT Image 2025년 5월 29일 오후 03_58_03.png 1111 나갑니다.


1111.

이건 좀, 흔하지 않은 숫자다.
눈에 딱 꽂히는 기분.
괜히 내가 뭔가를 잘 해낸 것 같은 감정이 올라왔다.

찰칵.
세 번째 수집 완료.


이전 회사의 선배들의 이름을 잠시 여기다 써보겠다. 그분들은 본인의 이름을 상대방이 쉽게 기억할 수 있게 위트있는 메일주소를 사용하고 계셨다. 공영칠 전무는 '007', 노영일 이사는 'no.1' 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5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그 이름과 메일주소가 기억나는거 보면 마케팅이 꽤나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처럼 차번호판이 1111이면 어디가서 위트로 활용할 수 있을것 같아 부러웠다. 연예인 차량으로 추정되는 흰색 벤츠 1111에 탄 연예인은, 최정상급 연예인이 되기위해 차를 준비했다고 농담 한마디 하지 않았을까?



이쯤 되니 나도 모르게 번호판에 등급을 매기기 시작했다.

4444보다 1111이 낫고,
7777은 구하기 어려워서 등급이 높고,
2222는 대중적이면서도 품격이 있는 숫자 같은 느낌.


그 판단의 기준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나는 내 나름의 '로얄넘버 철학'을 정립해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번호판에 진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사진첩엔 숫자 하나로 쭉 밀어버린 차량 사진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있었다. 딱히 의미는 없는데 매번 마주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숫자가 예뻐서 그런 걸까?
드물어서?
아니면 단순히 내가 발견했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쾌감이 내 하루의 기분을 바꾸기엔 충분했다. 누군가는 이런 걸 ‘작은 발견의 기쁨’이라 부를수도 있겠다. 어쩌면 아무 의미 없던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건 진짜 '나만의 것'이 되는 것이라서 즐거웠을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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