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룰 안에서 내가 무너졌던 날들
숫자가 쌓일수록 눈은 예민해지고, 마음은 욕심을 부렸다.
2222, 1111, 9999…
이미 3개를 모은 나는 스스로를 ‘로얄넘버 관찰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골프 연습을 마치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거의 습관처럼 주변 차들을 스캔하던 중
검정색 벤츠 GLE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뭔가 반짝이는 느낌.
번호판을 봤다.
4444.
나는 미소를 머금은채로 아무 말 없이 따라붙었다. 속도를 늦춰 그 차 뒤에 붙은 채 사진을 찍었다.
찰칵.
네 번째 수확.
확실히 멋진 차고 왠지 진짜 구하기 어려운 번호판 처럼 느껴졌지만, ‘4444’는 뭔가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하고 다른 스트레이트 번호랑 다르게 위풍당당하게 번호판을 말하기 애매하지 않을까라는 오지라퍼식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4444 이후부터 2달동안 스트레이트 번호판을 한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열심히 번호판을 보고다니는데도 당최 찾지를 못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도로를 봐도 5555, 7777, 8888은 없었다. 그러자 내 시야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스트레이트가 아닌 ‘유사 번호판(?)’들을 이리저리 조합해서 내 마음의 위안을 찾기 시작한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1121 : “아깝다. 10만 빼면 1111인데.”
119거1191 : "1111보다 더 유니크하고 좋은 숫자의 번호판이 아닌가?"
8828과 0060 : "왜 나란히 주차되있는거야. 퓨전으로 합체하면 8888 확보되는건데"
0060 : “앞뒤 대칭 느낌 나는데? 0000은 없겠지만, 얘도 좀 로얄 같네.”
‘진짜’가 잘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종종 가짜에게 감정을 투영한다. 마치 진짜인 양 아쉬워하고, 이미 가진 것처럼 자위하며, 그리고 스스로 기준을 무너뜨린다. 그게 당시의 나였다.
그 시절 나는 정확한 번호가 아니면 셔터를 누르지 않겠다는 수집가로서의 자존심과, 이 지난한 여정을 어떻게든 마무리하고 싶은 지친 순례자 사이에서 매일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만든 ‘로얄넘버의 룰’은 나를 통제하는 또 다른 규범이 되어버렸고 나는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유사한 것을 진짜처럼 바라보며 슬쩍 정당화하는 연습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건 미신이다.”
나는 어느 순간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급차에 어울린다던 번호도, 완벽한 숫자가 가진 ‘힘’도, 결국은 내 착각이었다. 하지만 그 착각은 나를 움직였다. 그래서 나는 계속 번호판을 바라봤고, 아무 의미 없는 숫자들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갔다.
그러니까 착각도 나쁘지 않다.
어쩌면 이 여정의 진짜 로얄넘버는 그 착각을 끝까지 이어가는 마음이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