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를 모으는 또다른 누군가
절반 이상의 번호판을 모으고나자 주변사람들에게 나의 하릴없는 행동에 대해 말하곤했다. 내가 한가지 숫자로 몰린 차 번호판을 수집하고 있다고 밝혔고, 굳이 왜 그런 행동을 하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애초부터 굳은 심지로 계획을 해온 사람 처럼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원래 의미없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 아니겠어요?"
"요즘 블로그에 올릴게 없어서 기획기사처럼 차근차근히 준비하고 있는 컨텐츠입니다"
별다를 것 없는 어느 평일 점심시간이었다. 회사 근처 식당으로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가던 길.
빌딩 앞 주차 공간에는 늘 그렇듯 이중주차된 차량들이 옹기종기 서 있었다. 자동차, 자동차, 또 자동차.
무심하게 지나치던 순간, 한 대의 검정색 제네시스 G80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번호.
3333.
나는 본능처럼 멈춰 섰다.
함께 걷던 동료가 멈칫하는 나를 돌아봤고, 나는 조금은 흥분한 상태로 말했다.
"마침 3333이 필요했는데!!"
찰칵.
여덟 번째 수집 완료.
웃겼다.
이토록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을
왜 이제야 봤을까.
그동안 나는 도로 위, 고속도로, 낯선 거리, 연예인 샵 앞, 심지어 쫓아가며까지 번호를 수집했는데 정작 내가 매일 오가는 회사 주차장 앞에서 그렇게도 원하던 스트레이트 번호판을 발견한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 이렇게 찰떡같이 와닿을 줄 몰랐다.
순간 하나의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혹시 여기에 7777도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8888이 나 몰래 몇 번이고 지나다녔던 건 아닐까?’
나는 늘 바깥세상에서만 보물을 찾으려 했다. 낯선 거리, 먼 고속도로, 익숙하지 않은 골목들. 하지만 정작 가장 눈앞에 있던 건 보지 못했다. 이건 단순한 번호판 수집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일상의 시선이 어딜 향하고 있었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일이었다. 회사 주차장에 멈춰 있던 3333은, 그래서 더 특별했다. 그 번호 하나가 다시 나를 ‘이 수집의 세계’로 끌어올렸다.
‘그래, 이걸로 6개 째야.’
‘세 개만 더 모으면 완성이다.’
도전의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흥분을 감출수 없었다. 반복된 일상 속에서 아주 작은 게임을 스스로 만들어냈고, 그 게임이 점점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꽤 오래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 3333을 단순한 ‘숫자’로만 볼 수 있을까? 이건 누군가의 취향, 누군가의 집착, 누군가의 상징 아닐까? 법인차일 수도 있고, 임원용 차량일 수도 있고, 혹은 나처럼 이런 숫자에 열광하는 또 다른 ‘수집가’의 소유물일지도 모른다. 이 도시에 나 말고도 스트레이트로 된 번호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들 중 누군가는 나보다 먼저, 조용히 숫자를 모으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들은 이미 이 짓을 다 끝내고 지금쯤 새로운 수집에 빠져 있지는 않을까?
3333을 발견한 날, 나는 ‘다른 수집가의 존재’를 상상했다. 이건 꽤 중요한 변화였다. 지금껏 이 행위는 ‘나 혼자만의 짓’이었다. 말도 안 되는 혼자놀이고, 혼자만의 놀이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 짓을 ‘내가 소속된 작은 세계’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혼자가 아닌 것 같은 상상. 그 상상이 주는 힘이 꽤 컸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을 하게 만든 건 단지 사무실 앞에 세워진 번호판이 3333인 제네시스 한 대였다. 그 번호를 보고 다시 회사를 들어서던 순간, 나는 살짝 웃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 이유 없이 웃는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내 안에는 작고 은밀한 즐거움이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