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를 모은게 아니라, 날들을 모았다.
2024년 6월 어느날이었다. 업체 미팅을 위해 택시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차는 번잡한 도산대로를 지나고 있었고, 나는 언제나처럼 앞차의 번호판을 본능적으로 스캔하고 있었다.
그때, 시야 한복판에 등장한 한 대의 차량.
노란색. SUV.
그 형태, 그 광채.
람보르기니 우르스.
도심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운 차량이었다. 눈이 먼저 놀랐고, 곧바로 이어진 번호판에 다시 한 번 놀랐다.
5555.
나는 속으로 외쳤다.
“와… 이건 진짜지. 인정”
그동안 막연히 믿고 있던 가설이 있다.
‘로얄넘버는 고급차에 붙는다.’
그 가설이 처음에는 농담이었다면, 이날부로 확신으로 바뀌었다.(6666 친구들은 예외로 치고)
9999 마이바흐, 2222 bmw, 1111 벤츠, 4444 벤츠 GLE, 3333 제네시스(?) 그리고 이제 5555 람보르기니 우르스까지 발견했다. 이정도면 거의 이론이 입증된 셈이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 번호들을 받아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숫자들은 분명히 특정한 권위나 비용에 의해 분배되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번호도 가진 자의 것이군."
나는 반쯤 빈정대며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납득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 수집 자체가 그런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했다. 기뻐야 할 타이밍에 기쁨이 덜했다. 그동안 그렇게 바랐던 숫자 중 하나였고, 사진도 또렷하게 찍었고, 차도 완벽하게 ‘로얄급’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공허감이 올라왔다.
‘왜지?’
‘왜 이건 그렇게 특별하지 않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너무 쉽게 얻었다.
5555는
아무 추격도 없었고,
신호 기다림도 없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택시를 타고 있다가 눈앞에 뚝 떨어진 보너스 같은 발견이었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건
번호 그 자체가 아니라 그걸 향해 가는 서사였는지도 모른다. 수집은 숫자를 모으는 일이지만, 정말 수집되는 건 그 숫자를 발견한 날의 풍경, 감정, 맥락이었다.
5555는
너무 멀쩡했고,
너무 말끔했고,
너무 별일 없이 다가왔다.
이제 정말 거의 다왔다. 이제 남은 숫자는 7777과 8888. 둘 다 ‘길하다’는 이미지가 강한 숫자들이고, 실제로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진짜 어렵겠네…’
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 둘은 꼭 서사 있게 만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5555는 내 가설을 강화시켜줬다. 고급차와 로얄넘버는 자석처럼 붙는다는 믿음. 하지만 동시에 이 수집기가 단지 데이터 축적이 아니라 서사의 수확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나는 이제 숫자만을 위한 사냥꾼이 아니었다. 조금은 이야기꾼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