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냈습니다.
수집은 끝났다.
1111부터 9999까지, 총 9개의 스트레이트 번호판.
각기 다른 장소, 다른 시간, 다른 감정으로 완성된 퍼즐이다.
처음은 호기심이었다.
그 다음은 장난이었다가 중간쯤부터는 의지였고, 후반부는 거의 집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8888을 찍은 날, 나는 그 집착으로부터도 풀려났다. 해냈다는 안도와 이제 끝났다는 허전함 사이에서 조용히 앨범을 넘겼다.
완성 후엔, 세상이 이상해졌다.
차를 타고 나가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3333, 5555, 8888이 말도 안 되게 자주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없어서 못 봤던 것들이 이제는 지나칠 수 없이 도처에 있었다. 나는 잠시 의심했다.
‘내 눈이 바뀐 걸까, 아니면 원래 있던 걸 못 본 걸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건 관찰과 수집이 끝나고 난 후에 찾아오는 착시였다.
혹은,
‘이미 완성된 것을 되돌아보는 시야’의 변화였다.
예전에는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차선을 바꿔 따라붙고, 신호를 일부러 기다렸고, 유턴을 감행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지나친다.
‘아, 또 있네.’
그게 전부다.
이상하게도 완성된 이후가 더 허무했다. 내가 그렇게 어렵게 느껴졌던 것들이 막상 다 모으고 나니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헛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이걸 왜 했지?’라는 질문은 자꾸 마음속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는 의미 없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누구도 내게 번호판을 모으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이걸 모은다고 보상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이 기록을 누군가 알아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했다.그건 어떤 외부 목적이 아니라, 내 안에서 시작된 작고 은밀한 열망이었기 때문이다.
이 수집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
작은 것에 몰두하는 법. 의미 없는 것에 애정을 갖는 법. 그리고 무언가를 끝까지 밀고 가는 일이 얼마나 웃기고, 얼마나 고요하고, 얼마나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인지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 그래서 뭐 어쩌겠어요.”
하지만 동시에 이 말을 덧붙이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냈습니다.”
어느 날의 우연히 발견한 마이바흐 9999로 시작해서
골목길에서의 2222 / 1111
흔들리는 마음으로 찍었던 4444.
회사 앞 3333.
회색 칸 6666.
도심 한복판에서 너무 쉽게 만났던 5555.
제주도에서의 7777과 8888
그리고 수없이 지나쳤지만 기억은 남아 있는 못 찍은 번호들까지 이어졌다.
그 모든 순간이 이제 나의 작은 세계를 이룬다. 나는 이 기록이 ‘번호판 수집기’로만 남지 않길 바란다.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태도, 쓸모없는 것에 시간을 바치는 감정,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하는 욕망, 그 모든 것이 내 삶의 ‘나다움’을 증명하는 방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는 대단한 꿈보다 하찮은 열정에서 더 자주 살아난다.
그게 바로 내가 이 기록을 남긴 이유다.
“사람은 원래 의미 없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 아니겠어요?”
이 문장으로 시작했던 여정을 다시 이 문장으로 마무리하며, 기획 블로그의 마지막 장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