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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도서관에서

새로운 기억의 웨이포인트

by 비읍비읍

결혼을 하고 새로운 지역에 터를 잡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온 지 어느새 3년반이 지났다. 집이라는 것을 '집 값' 이라는 한가지 이유로 우열을 가리고 싶지 않아, 부차적인 부분에서 우리집의 강점을 생각해보았다.


우선 언덕의 최정점에 위치한 곳이라서 폭우로부터 안전하다.

3년전인 2022년 8월 강남역 일대와 여의도 부근 도로들이 침수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일때가 있었다. 그날도 무척 안전했다. 그 날의 나는 코로나에 걸려 1주일간 자가격리를 하고 있었는데, 집 안에서 느끼기로는 "창문을 강하게 때리는 비가 오는구나-" 수준이라고 느꼈었다. 심지어 아파트 단지 내에도 전혀 물이 고여있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 지하철역쪽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성북천을 지나 청계천까지 흘러내려가 그쪽에서 물난리가 났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베드타운(bed town)이라고 불리는 동네가 아니다.

분당/일산과 같이 서울 내에서도 재개발된 지역들은 온통 아파트와 주거민들을 위한 상가들로 가득차있다. 나도 그런 구성이 '살기 좋은'곳이라는데는 동의하지만, 집이라는게 '먹고 자고'만 하는곳일까- 라는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적당히 걸어서 산책해 나갈 수 있는 범위 내에, 이벤트 같은 공간들이 있는것이 거주지로서 더 적합한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것이다.

대학교가 근처에 있어서 상권이 형성되어있다던가, 부유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성북동 주택단지(저택 단지라고 하는게 맞으려나)가 있어 꼬부랑 길을 운전하며 오며가며 아이쇼핑을 한다던가, 북한산과 같이 이름난 산이 근접해 있어서 일년에 한번정도 아내와 등산을 다닐수 있다던가, 광화문처럼 전통의 중심지가 버스로 15분 정도면 접근가능하다던가, 시립/구립 도서관이 집앞에 있어 쉽게 접근해서 갈수있다던가- 하는 그런것 말이다.


열거한 요소들을 우연치않게 충족하고 있는 집에 살고 있기에, 나는 효용을 극대화하기위해 집앞의 도서관을 방문했다. 짧은 세월을 살면서 늘 도서관을 버스타고 한참을 가야지만 갈수있는 곳에 살았었는데, 이토록 '인근'에 있는 도서관이라니. 벌써 감개무량한 기분이 차오른다. 집을 나서서 걸어서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위치였는데, 이정도면 인근에 있는 도서관이 아니라 도서관과 우리집은 한 몸이나 다름없다고 선언해도 될것 같다.





아내는 주중에 책을 보거나 개인 작업을 할때 도서관 열람실에 들어와서 시간을 보내었다고한다. 집에도 서재방을 꾸며놓았기에 충분히 집에서도 할 수 있는것이지 않나 싶었는데, 공간감이 확실히 다르다. 사실 집이라는게 아무리 커도 도서관만큼의 커다란 공간감을 주기는 어려운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내를 따라 온 도서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친구들이 인강을 켜놓고 문제집을 풀고있다던가, 어르신들이 아주 편안해보이는 빨간색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열심히 보고 계셨다.


나와 아내는 공부를 하는 좌석들보다는 도서관에 책이 뺵뺵하게 꽂혀있는 열람실 한쪽 구석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자리를 앉기까지의 모든 순간들이 내게 꽤나 새로운 경험인지라, 이것이야 말로 이번 브런치 스토리의 테마다!(유투버들 스타일로 말하면, 유툽 각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노트북을 열었다.


너무 오랜만에 방문한 도서관이라 열람실 속 책장을 찬찬히 둘러보며 옛 추억에 잠기게되었다. 학교 도서관과 집앞의 도서관을 제외하고 내 인생에는 4곳의 도서관이 있었다. 그 도서관들은 "방문"했었다 라는 표현보다도 문지방이 닳도록 뻔질나게 다녔던 곳이기에 도서관이 "존재"했다-라고 하는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첫번째는, 시립 도서관이었다가 도립 도서관으로 승격된 도서관이다. 외형은 마치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설명하기 위해 그려놓은 삼각형을 그대로 건물로 만들어버린 것 처럼 생겼다. 위치가 정말 난해한 곳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근처로 가더라도 한참을 등산을 했어야만 했는데, 초등학생의 짧은 보폭으로는 그 길이 세상에서 가장 긴 길처럼 느껴졌었다. 단 한번의 평지나 내리막길이 없이 꾸준히 오르막길을 올라갔어야 했다.


그 길은 백화점을 지나 아파트 단지를 지나, 가파른 아스팔트로 도배된 골목을 한참을 올라가고나서야 저기 멀리에 '이곳이 도서관 입구 입니다'라고 써있는 대감집 대문에 겨우 도달할 수 있었다.


주로 만화책을 보다가 잡식성 동물처럼 그냥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는 책을 집어들고 읽곤 했다. 주말행사처럼 주말에는 꼭 그곳에 방문했는데, 당시에는 놀만한 컨텐츠가 없었던것인지 왜 그렇게나 뻔질나게 도서관을 들락날락해왔는지- 지금 생각해보니 미스테리한 일인것 같다.



두번째는, 구에서 운영하는 청소년문화센터였다. 아마 당시에는 도서관이라는 명칭이 딱딱해보였는지 문화센터-라는 유들유들한 느낌으로 이름이 바뀌었었다. 나는 프로 운동선수가 팀을 이적하듯이 두번쨰 도서관으로 내 메인 스테이지로 이동했다. 중3 부터 고3때까지 주말에 다른 학교 친구들과 교류할 장소가 문화센터밖에 없었다니, 얼마나 아름답고 건전한 학창시절인가?.


주말의 일과의 시작은 아무생각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문화센터로 가는 버스를 타는 일이 것이었다. 자리를 적당히 괜찮은곳에 맡아놔야 "공부도 하지만 책도 읽고 밥도 같이먹고 놀기도하고 시청각 실에서 dvd도 빌려서 보고, 끝나고 바로 옆에있는 공설운동장에서 농구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화센터를 가서 공부한답시고 가방에 책을 바리바리 싸서 아침에 일찍 집을 나섰었다. 그때마다 부모님은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내 입장에서는 아무런 간섭도 없이 점심/저녁 식대까지 지원받을 수 있었으니, 이거 얼마나 개꿀인 자유생활인가!?


하지만 당시에 문화센터에서 보낸 시간을 정량적으로 재구성 해보자면, 집밖에 있던 시간을 100으로 놓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공부는 10이요, 희한한 책 읽기는 20이요, 끝나고 농구하는건 30이었다. 심지어 나머지 40 중 30은 친구들과 떠드는 시간이고, 나머지 10은 지나가는 다른학교 여고생들을 쳐다보며 잡담하기였다.



세번째는, 제일 애매모호한 곳에 위치한 도서관이었다. 대학생때 전공 과목을 공부 하러가기도 했고, 2016년도에 경험한 3개월의 짧은 백수 시절에 시간을 때우기위해 잡다한 책을 읽으러 가기도 했었다. 집 앞 버스정류장은 10개 이상의 버스 노선이 정차하는 핫플레이스였는데도 그곳으로 가는 버스는 단 한대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걷자니 거리가 4km나 되어 한시간이나 걸어가야했다. 결국에는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에 혼자 고무되어 왠만하면 걸어다니긴 했다. 이 도서관을 떠올릴때마다 혼자서 쓸쓸하게 시간을 보내던 곳이라서 그런지 유달리 외딴섬 같은 도서관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이 도서관을 다니던 때는 누군가의 추천을 받지 않고 도서관 책장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책을 골라서 보았다. 어느 책장에 꽂혀있는지나 책 제목의 아우라 등을 통해 내가 선별해내었다. 2016년에 블로그를 운영하며 가벼운 독후감처럼 써놓은게 있어, 당시의 도서목록을 찾아보았다. 이제와 다시 보니, 내가 이걸 왜 읽었엇더라?는 생각이 들었다.


폴 크루그먼 /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 '새로운 미래를 말하다'

정유정 / '7년의 밤'

문유석 / '개인주의자 선언'

마크 쉔,크리스틴 로버그 / 편안함의 배신

송형석 / 위험한 심리학

최정규 / 이타적 인간의 출현

케네스 포메란츠, 스티븐 토픽 /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이름만 같지 전혀 다른 세 도서관에서 가져온 기억들을 떠올리며 집앞의 도서관 열람실을 천천히 걸었다. 책장 사이를 돌며 습관적으로 비교해보았다. 위치적으로 얼마나 가까운지, 열람실 책장의 간격은 어디보다 좁은지, 새 책이 들어오는 빈도는 어느정도인지 그런것들 말이다.


그렇게 조용히 둘러보다가 문득 마음 한 켠에 익숙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늘 먼 곳에 있어야 할 것 같던 도서관이 이젠 나의 생활 반경 안에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책을 사서 읽는 일이 익숙해졌지만, 도서관 책장을 돌다 유홍준 작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보니, 이 공간이 ‘빌려 읽는 기쁨’을 다시 불러일으킨다는 걸 깨달았다.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기 위해 스터디카페를 전전하던 내게 이곳은 더없이 좋은 베이스캠프가 되어줄것만 같다. 이번 방문을 시작으로, 이 도서관을 내 기억 속 ‘네 번째 도서관’이라 불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그저 책을 읽기만 하진 않겠지만, 이 조용한 공간에서 또 다른 나의 시간이 시작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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