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스쳐지나간 그들의 산재사고

누가 죽었고, 왜 죽었고, 누구의 책임일까

by 비읍비읍

그동안 뉴스는 짧았고, 사고는 되풀이되어왔다.

SPC에서는 2022년 10월 평택 SPL 제빵공장에서 20대 노동자가 끼임 사고로 사망한데 이어, 2023년 8월에도 50대 노동자가 성남 샤니 제빵공장에서 기계에 끼어 사망했다. 올해인 2025년 5월 19일에는 시화공장에서 50대 노동자가 윤활유를 뿌리는 작업을 하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은 시화공장을 직접 찾아 산재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요구했다.

-라는 기사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사망한 분에 대해 조의를 표한다.


뉴스를 접하고, 나도 모르게 손이 멈췄다.

몇 해 전, 나 역시 SPC 계열의 제빵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죽을 오븐에 붓고, 다 구워진 제품을 조심스레 컨베이어 벨트에 올리는 일이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이었지만, 그 현장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기계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그곳에서 ‘잠깐의 실수’는 언제든 '영영 돌아오지 못할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기가 감돌았다.


기계에 끼여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내가 거기 있었더라면'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그들—일하다 죽은 이들의 얼굴을 상상하게 되었다.


이번 사고 이후, 이재명 대통령이 시화공장을 직접 찾아 산재 방지 대책을 내놓았다는 뉴스를 보았다. 대통령의 의지 자체는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 대책이라는 것이 '생산직 8시간 초과 근무 금지', '3교대 전환' 등이라면, 나는 그것이 과연 이 구조를 바꿀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샤니 빵공장에서 일했던 유경험자로서, 나는 이곳에서 생산직으로 일하시는 분들의 사정과 입장을 어렴풋이나마 안다. 동시에, 꽤나 위험한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으로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도 느낀다. 그래서 마음이 쉽게 한 방향으로 향하지 못하고 있다.




그때, 그런 결정을 했어야만 했던 당시의 나


가수 '부활'의 '비밀'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면 머리속에 특정한 상황이 단박에 튀어 오른다. 묵직한 버터들과 엄청나게 많은 빵이 동시에 구워져서 나오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을 하는 것이다. '음- 맛있겠네-'를 넘어 빵 지옥에 갇힌 느낌을 주는데, 그 와중에 나는 얼떨떨하게 각성된 몸을 이끌고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공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장면이 떠오른다.


1. 선택의 이유


나는 20대 초반에 군대 전역하면서 성남에 있는 SPC 샤니 빵공장에서 와플라인 생산라인에서 근무했다.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지만, 3개월 반이라는 시간을 했으니 ‘근무’라는 표현을 써도 될 거라고 생각한다. 당시 같이 일했던 분들의 말로는 20대가 이렇게 힘든 라인에서 1주일 이상 일하는 건 처음 본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3개월 반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 강렬한 기억이었기에 당시의 상황 속 내 기억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이 글이 현장 상황을 전달함으로써 SPC 산재사고를 둘러싼 주변환경들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에세이적인 성격을 갖길 바란다.


2011년 4월 전역 예정인 나는 복학 후 필요한 자금 등을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었다. 근무지가 격오지였던지라 말년휴가 직전까지 쓰지 못하고 열심히 모아둔 휴가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그래서 14박 15일짜리의 말년휴가를 나오기 보름 전에 3박 4일짜리 포상휴가를 나왔다. 포상휴가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보는데 큰돈을 쥐여주는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았다.


나는 대학생 신분치고는 큰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통해 한 달에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이라는 것은 최저시급에 근로시간을 곱하는 ‘월급여 = 최저시급 x 월근로시간’ 공식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에 최저시급은 4,320원이었는데 내가 목표한 금액을 모으기 위해서는 하루에 4시간으로는 택도 없었다. 최소한 8시간은 일해줘야 할 것 같은데 도통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내가 살고 있는 성남에 위치한 샤니 빵공장에 대한 아르바이트 공고를 보게 되었다.


내가 당시에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지푸라기 동아줄은 샤니 빵공장 아르바이트뿐이었다. 주변에서는 하루 일하고 도망친 친구들이 수두룩하다는 우려 섞인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지만, 그곳보다 많이 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지원서를 작성하였고 근무시작 가능일자는 나의 말년휴가가 시작되는 날 저녁 7시였다.


2. 최저시급의 최대 근로시간 계산법


샤니 빵공장에서의 근무시간과 내가 벌어들일 수 있는 소득은 다음과 같았다.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교대하는 2교대 근무를 하였으며, 매주 주간/야간이 뒤바뀌는 교대 근무를 하기 위해 토요일에는 18시간을 일하는 조건이었다. 예를 들자면 첫째 주는 오후 7시에 근무를 시작해서 오전 7시에 교대를 하고 퇴근한다. 그러다가 토요일에는 오후 7시에 근무를 시작해서 다음날 오후 1시까지 근무를 하고 퇴근하는데 이때 18시간 근무를 하게 된다. 그리고 월요일부터는 오전 7시에 근무를 시작한다.


그리고 최저시급은 추가근무를 할수록 수당이 붙는다. 하나의 조건이 붙을 때마다 최저시급에 1.5배씩 배수가 적용되게 되는데, 돈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야간 근무에, 주야간 맞교대를 한다는 것 자체는 돈을 최대로 벌어 갈 수 있는 구조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오전 7시에 시작해서 오후 7시에 퇴근하는 주간조일 때는, 8시간 동안은 4,320원 시급을 적용하고 추가시간인 4시간 동안은 4,320원의 1.5배인 6,480원을 적용한다.

이날은 60,480원을 번 것이다.


오후 7시에 시작해서 오전 7시에 퇴근하는 야간조일 때는, 일단 야간 근로수당이 적용되어 4,320원의 1.5배인 6,480원을 적용하여 8시간을 일한다. 추가 시간인 4시간 동안은 4,320원의 1.5배 x1.5배인 9,720원의 시급으로 4시간을 일한다.

이날은 90,720원을 번 것이다.


하지만 주간일을 하다가 야간일로 바뀌는 주야간 맞교대일 때는 어떨까?

오후 7시에 출근해서 다음날 오후 1시에 퇴근하는 맞교대일이다. 일반적인 야간조의 근로시간에서 6시간을 더 일한다. 이때 추가 근무하는 6시간 동안에는 추가*추가 근로에 해당하여 9,720원에서 1.5배를 더 적용해서 시급을 받는다.

이날은 207,360원을 번 것이다.


당시에 아무런 자격증도, 경력도 없던 나는 시급을 적용받는 일만 할 수 있었다. 시급을 올릴 수 없으니 몸을 갈아 넣으면서 많은 시간을 일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렇게 근무시간과 급여가 된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나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아는 것과 실제 현장은 달랐다.


말이 하루 12시간 근무를 하는 것이지, 공장까지 가는데 30분 걸리고 식품회사니 머리카락 등이 들어가지 않도록 식품회사 전용 옷을 갈아입고 전 교대조가 늦지 않게 갈 수 있도록 10분 정도 미리 투입이 되어주어야 했다. 그럼 하루에 일에 쏟는 시간은 14시간인 것이다. 잠을 6시간만 잔다고 해도 식사를 포함해 개인적으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4시간뿐이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매우 고된 일이었기에 잠을 6시간만 잘 수는 없다. 8시간은 자야 했다. 그럼 개인시간은 오직 2시간뿐인 것이다.




빵공장 속 와플 생산 라인에서의 나


게다가 내가 배치된 라인은 와플 라인이었다. 와플을 생산해서 출하를 해야 하는 곳이었는데 굉장히 고된 곳이었다.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지고 나니 와플라인의 전체적인 흐름을 알게 되었다. 3일 정도 매일 12시간씩 일을 해보니 알 수밖에 없었다.


1. 원재료 수급


우선 출근하면 중력분, 박력분을 구분해서 밀가루를 열 몇포대를 구르마에 담아서 와플라인으로 가져온다. 밀가루 뿐만 아니라 설탕, 이스트 등등 다른 재료들도 가져와야 했기에 3번 정도 왔다 갔다 했어야 했다. 내가 가져온 재료들은 와플라인 라인장이라는 분이 배합기에 알맞게 집어넣고 배합을 시작한다. 배합기계가 아주 커서 누군가 미끄러져서 들어간다면 사람이 들어간 채로 배합기가 돌아갈 수도 있는 정도였다.


2. 냉동 와플 생지 조달


배합기계가 일을 할 때 나는 냉동창고로 구르마를 끌고 갔다. 냉동창고에는 산더미처럼 다양한 원재료/재공품들이 있었는데 내가 매일 가져와야 하는 것이 있었다. 다른 생산공장에서 만들어서 냉동상태로 전달된 냉동 와플 생지였다. 내 키보다 훨씬 높게 쌓아 올려서 3번을 왔다 갔다 했어야 했으니, 상자수를 기준으로 하면 약 12개씩은 한 번에 옮겨왔던 것 같다. 와플라인에서 냉동창고까지 꽤 거리가 되었는데 너무 루틴한 일이 되다 보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걸어 다녔다.


그러다가 핸드폰도 없는 상태로 냉동창고에 들어갔는데 문이 닫혀버린 것이다. 원래는 안에서도 열 수가 있어야 하는데 고장이 난 것이다. 연락할 길도 없어서 막막했는데, 다른 사람이 언젠가는 와서 냉동제품을 가지러 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보자-며 기다렸다. 다행히 30분 만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냉동인간이 되지 않은 상태로 나갈 수 있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았으면 나는 동태가 되어 산재사고 사망자 중 1인으로 이름이 남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져온 냉동생지는 발효실에 넣기 위해 철판에 가지런히 깔아놓아야 했다. 나는 손이 원체 뜨거운 사람인데도 냉동제품을 장갑 낀 손으로 만져서 옮기다 보면 손끝이 저릿하도록 차가워졌다. 하나의 rack에 냉동생지 30개가 올라가는 철판 15개씩 꽂아두고 발효실에 밀어 넣었는데, 하루에 20개의 rack을 사용했었다.


3. 발효시간 활용하기 - 식빵 컷팅


발효가 되는 동안 우리 라인에 있는 사람들은 식빵을 자르는 라인에 투입이 되었었는데, 식빵이 오만 개는 되어보이는 공간에 들어가서 아주 구식 컷팅기에 식빵이 끊기지 않도록 식빵을 밀어 넣는 일을 했다. 3인 1조로 작업을 하였는데, 나는 주로 식빵을 컷팅기에 계속 밀어 넣는 작업을 했고, 다른 두 명은 컷팅된 식빵을 받아다가 포장지에 넣고, 포장지를 묶어서 마무리해 다른 rack에 정리하는 일을 했다.


식빵을 한번에 4개까지 올릴 수 있었는데 덜덜거리는 컷팅기가 잘 컷팅할 수 있게 아주 약한 힘으로 눌러줘야 했다. 매일 2시간씩 식빵 컷팅을 해야했는데, 컷팅기의 덜덜거리는 굉음에도 정신에 멍해져 아무 생각 없이 식빵을 밀어 넣었다. 그러다가 컷팅기에 손가락이 걸릴 뻔했는데, 나보다 앞선 다른 알바생은 식빵 컷팅할 때 손가락 한마디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고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식빵을 컷팅하며 발효된 냉동생지와, 아침에 가져온 밀가루 등으로 만든 와플반죽은 약 30m짜리 와플 오븐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와플 오븐은 컨테이너벨트처럼 약 60개의 와플모양의 팬이 돌아갔는데 2인 1조로 오븐에 앞에 서야만 했다.


4. 와플 베이킹, Just bake


나는 오븐 앞에 서서 처음에는 빠르게 움직이는 와플 팬에 생지들을 2개 또는 6개씩 올려 넣었다. 오른쪽에 있는 반죽들을 왼쪽에 있는 오븐에 옮겨 담아야 했어서 오뚝이처럼 몸을 뒤뚱뒤뚱하면서 작업을 했다. 생지를 올려놓은 와플 팬은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오븐 안으로 들어갔고, 약 10분 정도 뒤에 완성품의 형태로 왼쪽에서 나타났다.


이때부터는 생지옥이 시작된다. 2인 1조인 팀에서 왼쪽 사람은 긴 포크로 완성품을 집어서 컨베이어 벨트로 올려두는 일을 했고, 오른쪽 사람은 계속해서 반죽을 와플 팬에 올려 두어야 했다.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방식으로 일을 했는데, 10분 쉬는 동안에는 와플라인의 라인장이 혼자가 2인분 몫을 굉장히 빠르게 수행했다.


50분 동안 300도가 넘는 오븐 앞에서 땀을 흘려서였는지 쉬는 시간 10분 동안 정수기에서 물을 벌컥벌컥 먹기에 바빴다. 오븐 앞 작업공간에는 머리 위에 공조장치가 있었지만, 너무 시원하면 오븐이 식어버려 제대로 와플을 구울 수 없으니 시원한 환경은 될 수 없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매일 12시간의 근무를 했어야 하니 오븐에 있는 시간이 약 8시간이나 되었다. 50분 일하고 10분씩 쉬더라도 오븐에 5시간 가까이 있어야 하니 흘리는 땀의 양도 어마무시했다.


땀은 땀대로 흘리고 10분간 정수기 물만 먹으니 몸 안의 전해질 농도가 불균형이 생겨서, 어느 시점부터는 출근할 때 소금을 챙겨가서 먹곤 했다.


온도만 나를 힘들게 한건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기계가 대체했을법한 일을 사람이 하다 보니 50분 동안 왼발 오른발 오뚝이처럼 리듬을 타며 일을 해야 했다. 체력이 강력하다고 자부하던 나였지만 발이 많이 아프고 체력적으로 한계에 부딪혔다.


근무복이 땀이 절어버리고 작업화로 신은 쿠션 좋은 농구화가 밀가루 범벅이 된 상태로 식당에 간 날이 부지기수였다.


물론... 내 나이대에 아주 쾌적한 공간에서 일하는 애도 있었다.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다른 라인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열에 녹아내려서 흘러내리고 있는 사람들은 몇 라인 안되었다. 불량품을 버리는 길에 지나가며 본 땅콩크림 샌드 라인은 내 입장에서는 반도체 생산 공장처럼 대부분 자동화되어 있고 에어컨이 빵빵해서 점퍼를 입어야 할 정도였다.




당시에 업무를 하며 마스크는 꼈지만 일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할 시간이 많이 있었다. 왜 이곳에 왔는지, 어떤 상황이라서 돈을 벌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20살 많은 형님은 제약회사에서 영업사원이었는데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셧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묻진 않았지만, 궂은일만 도맡아하면서 이곳에서만큼은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식이 나랑 비슷한 나이인 한 아주머니는 지방에서 올라오신 분이었다.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데 경력이 단절되어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라고 하셨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몸으로 때우는 것이었는데 많은 시간을 일해서 돈을 많이 벌었어야 했기에 악착같이 일하셔야 했다.


이런 사정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최근 산재사고가 발생했던 위험한 업무를 부여받더라도 마다할 수 없었다. 이곳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일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산재라면 당시의 나도 세 가지 유형의 산재를 경험했다.


첫 번째로 매주 진행되는 주야간 맞교대 근무에서 비롯된 불면증이다. 한 주는 밤에 잠을 자고, 한 주는 낮에 잠을 잔다는 건 기계가 아닌 이상 적응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머리만 대면 자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는데도 불구하고, 주야간 맞교대가 있는지 3일은 제대로 잠에 들 수 없었다. 그러다가 적응이 될 만하면 다시 주야간이 맞교대가 되는 극한의 일정이었다.


직접 이런 극한의 일정을 소화하다보니 컨디션 유지를 위해 그 누구도 만날 시간적/체력적 여유가 없었다. 늘 몽롱한 상태로 출근카드를 찍고 옷을 갈아입으러 약 3분 남짓한 공터를 걸어 들어갔었다. 그때마다 우연히 듣게 되던 노래가 있었다. 부활의 ‘비밀‘이라는 노래였다. 그 멜로디가 지금도 거리에서 들려오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언제 산재가 날지도 모르는 구역으로 들어가는 마음과 답답한 기억이 되살아나곤 한다.


두 번째로는 고온 환경에서의 신체 변화였다. 300도 이상의 고열 오븐 근처에서 일하면서 체질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원래 몸에 열이 많기는 했어도 땀이 많이 나는 편은 아니었다. 땀이 나더라도 적당한 수준으로 생활을 할만했었는데, 이때 체질이 바뀌었다. 50분 동안 땀을 흠뻑 흘리고 10분간 물과 소금을 충전하는 것을 5~8회를 반복하니 몸이 축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교에 복학하고 나서는 아주 적은 열감에도 땀을 흠뻑 쏟고는 했는데 명백히 빵공장에서 일하기 전후로 내 몸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2주일에 한번 오븐의 와플 팬을 전체 세척하는 일을 하며 허리를 다쳤다. 주야간 맞교대를 하다가 2주에 한 번은 와플 팬을 전부 분해해서 양잿물에 세척 후 물/세제 세척을 거쳐 건조하고 다시 조립하는 일을 했다. 당시에 같이 일했던 20살 많은 형님과 둘이 해당업무를 담당했는데 일을 하면서 몇 번이나 허리를 삐끗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와플 팬 하나에 30kg 이상이었고 총 개수는 50개 이상이었다.


이를 오븐에서 해체하고 세척하는 공간까지 운반하였으며, 세척 이후에 다시 재조립을 하는 일을 하는데 허리 똑바로 피고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2주에 한번 작업을 하는데도 매번 허리를 삐었으며, 주야간 맞교대가 되는 날에 맞추어 작업을 하다 보니 잠을 8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은 자야 체력이 회복되는 수준이었다.




이때의 경험과 기억은 현재 공장에서 일하지 않고, 어찌 보면 화이트칼라-로 일하고 있는 내게 힘든 추억일 뿐이 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4년이 지난 지금도 샤니 빵공장에서는 유사한 산재사고가 발생하고 있는 걸 보니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긴 하겠다 싶다. 물론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가져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책'이라는 말은 공허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목숨보다 값나가는 급여가 있을 수 없지 않겠는가.


이번 SPC 산재 사고를 계기로, 생산직 근로자의 일상과 현장이 공론의 장에서 다시 조명되기를 바란다. 이들의 삶이, 단지 ‘사고’라는 말로만 소비되지 않기를 바란다. 반복되는 비극 위에, 반복되지 않을 약속 하나쯤은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럴 때 내 글이 공론화의 경험적 초석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네번째 도서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