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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들

가까운건 아니지만, 가까운 사이.

by 비읍비읍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과 저녁을 했다. 어느덧 그 친구들과 알고 지낸 지 25년이 흘렀다. 숫자로 보니 엄청나게 긴 세월이지만, 막상 마주 앉아 있으면 벌써 그렇게나 시간이 지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사람들끼리, 2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같은 세계를 살고 있을까?


한때는 그들과 내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가치관, 말투, 내가 긁히는 포인트까지—예전엔 그게 잘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제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동안 쌓여온 세월의 서사가, 어쩌면 ‘다름’을 이해하는 법을 자연스레 가르쳐준 게 아닐까 싶었다. 각자의 생각이 달라도, 그저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 말이 통하지 않아도 결국 통하는 사람들. 우리는 그렇게 오래 알고도 여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이였다.


예전에는 늘 만남의 마무리를 노래방에서 했는데, 갈때마다 2~3시간씩 노래를 부르는게 국룰 코스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마무리를 위애 노래방으로 향했다.

노래방에서 예전 노래를 부를 때 특히 그런 감정이 찾아왔다. 요즘은 듣는 노래는 많아도 부를 노래를 따로 연습하진 않는다. 그래서 노래방에 가면 부를 게 없다고 늘 생각했는데, 막상 옛 노래를 함께 부르니 묘하게 시간이 되감기며 예전 기억들이 따라왔다. 어떤 노래엔 그때의 분위기가 그대로 붙어 있었고, 그 시절의 나도 그 안에 있었다. 순간적으로 ‘지금의 우리’가 아니라 ‘그때의 우리’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늘 다름 속에서 협업이 존재한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오랜 친구들이야말로 그 협업의 전형에 가장 가깝다. 각자가 다른 삶을 살아가면서도, 오랜만에 만났을 때 서로의 다름을 간접적으로 느끼고, 그걸 통해 나 자신도 확장된다. 생활 방식의 외연만이 아니라 사고의 외연까지도 말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서로가 달라진 지금까지의 시간 전체였다.


그렇다고 모든 관계가 이렇게 유지되는 건 아니다. 꽤 가까웠던 친구들 중엔 여러 이유로 멀어진 사람들도 있다.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서일 수도 있고, 살면서 결이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제는 함께 어울리던 무리가 해체되어, 경조사에서나 겨우 얼굴을 보는 친구들도 있다. 이런 변화가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거자필반, 회자정리—헤어짐은 만남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지금의 나는 일적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 ‘업무’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시선과 감정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결혼을 했기에 또 다른 균형점이 생겼다. 하루의 일정 중 일정 부분은 아내와 보내야 하고, 주말은 함께하는 시간으로 남겨둔다. 내가 선택한 사람과의 시간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다. 친구들 역시 각자의 가정과 아이가 있고,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분주하게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완전히 결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진다. 꼭 맞는 사람들과 만나기도 벅찬 시간 속에서,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쓸 것인가가 일종의 선택이 되어버린다.




그렇지 않음에도 여전히 묶여 있는 관계들이 있다. 단순한 의리나 관성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이미 함께 보낸 시간이 그만큼 두꺼워서다.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삶의 방향이 달라도, 이해의 깊이가 사라지진 않는다. 오히려 각자의 세월이 서로의 문장을 완성시켜주는 것 같다. 나는 이걸 ‘시간이 만든 이해’라고 부르고 싶다.


오랜 친구들이라고 해서 꼭 가까운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보낸 세월이, 지금의 우리를 이해하게 만든다. 때로는 그 다름이 관계를 느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느슨함 안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서로의 인생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월만큼은 알고 있다. 나는 여전히 그 오래된 관계 속에서, 이해받고 있다는 기분을 얻는다. 그리고 그건 어떤 새로움보다 오래가는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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