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워지니 그저 누워있었다.
이번 주말은 ‘내가 보낸 주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기존의 나라면 살지 않았을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어쩌면 과거의 어느 시점의 내가 했을 법한 행동들을 되풀이했다.
나는 주말에 ‘무언가를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주중엔 루틴한 일 밖에 할 수 없으니, 행동의 자유도를 높일 수 있는 건 주말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주말에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많은 일을 했다.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니라, 어떤 상황들을 만들어내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번 주는 달랐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내게 너무 많은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도비처럼 “도비 이즈 프리!”를 외칠 일도 없는데, 이번엔 진짜 그런 기분이었다. 자유의 원인은 단순했다.
나를 전혀 속박하지도 않는 아내가 친구들과 지방으로 놀러 간 것이다.
유부남들에게는 황금 같은 주말의 시간. 그런데 나는 그 시간을 완전히 말아먹었다. 처음엔 이 시간을 ‘기깔나게’ 활용해서, '이번 주말 나만큼 잘 보낸 사람은 없을 걸?'이라는 자신감으로 채워보려 했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유부남인지라, 토·일 이틀을 통째로 노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여기저기 연락해봤지만, 다들 다른 일정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 그럼 나도 내 일정 만들면 되지!”
…그런데 토요일 오전 10시, 아내를 여행 출발지에 내려주고 집에 돌아온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잠은 죽어서 자는 거라며 늘 큰소리치던 내가, 아무 망설임 없이 침대에 다이브 인(Dive in), 그리고 바로 웹툰 정주행을 시작했다. 아직 연재 중인 작품인데도 굳이 처음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온 회차가 286화, 한 편당 5분만 잡아도 1400분. 거의 24시간짜리 코스다.
처음에는 너무 재미있었다. 다시보니 예전엔 눈치채지 못했던 복선이 보이고, 앞뒤 회차를 넘나들며 떡밥을 추적하고, 댓글을 읽으며 시공간을 초월한 토론의 장에 참여했다.
점심엔 두찜에서 로제찜닭을 시켜먹고, 다시 바로 침대로 복귀했다. 너무 자연스럽게도 말이다. 한쪽으로 누워보다 어깨가 아파 반대쪽으로 돌리고, 그러다 또 같은 포즈로 돌아오는 무한 반복.
머릿속에서는 ‘아 이제 진짜 일어나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핑계맨의 단골 멘트가 튀어나왔다.
'이것까지만 보고…', '알람 딱 한시간만 맞춰놓고, 그거 울리면 진짜 끝낸다'
그러나 3시간을 더 보다가는 낮잠에 빠졌다.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나 다시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웹툰을 켰을 때, 창밖엔 노을이 아주 기가 막히게 물들고 있었다.
'아, 오늘 같은 날엔 나가서 뭔가 했어야 하는데. 주중에 못하던 한강 자전거 라이딩이라도 했어야 했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스크롤을 계속 내렸다.
오후 5시, 아버지께 전화가 왔다.
“6시까지 오기로 한 거, 그대로 진행하는 거냐?”
이제쯤 출발했을 줄 아셨나 보다.
“아직 집이에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갑자기 불만이 폭발했다.
“이씨… 괜히 웹툰 보느라 시간 다 썼네.”
누구한테 화를 낼 수 있지.(?)
일요일 아침, 본가에서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으며 말했다.
“집에 가서 할 일도 있고, 주말 생활도 있으니 바로 일어나볼게요.”
오전 9시 반, 집에 도착했다. 샤워하고 간단한 집안일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봤다. ‘쓰읍… 조금만 누워있어도 되겠는데?’ 그리고 다시 웹툰을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이것까지만 보고 진짜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모든 회차를 다 보고 나니 오후 6시였다.
밖은 또 캄캄해졌다.
‘하… 이번 주말 완전 나가리네.’
허망한 마음을 다잡고, 그래도 ‘독서’를 해야겠다고 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미 디지털 스크롤 방식에 절여진 뇌는 종이책의 속도를 견디지 못했다. 눈으로 문장을 쫓는데, 아무 내용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은 생산적인 것을 할 날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오늘은 이 말도 안되는 하루를 박제시켜놓고, 뒤늦게나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을 확실히 해봐야겠다.'
그때 문득, 오래된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12년 전, 단칸방 하숙집에서 자격증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나는 하루를 불태우며 공부했고, 그 시간이 정말 즐거웠다. 공부를 하면 실력이 늘고 있다는 게 명확히 느껴졌고, 그게 곧 ‘사는 맛’이었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느끼면서도, 이상하게 겸손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주말, 오늘처럼 붕 떠버린 날이 있었다.
이틀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자괴감에 빠진 그날, 일요일 밤이 되기 세 시간 전, 나는 결심했다.
‘오늘의 나를 묶어버리자(nail it)’. 그래서 **〈메멘토〉**를 봤다.
〈메멘토〉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다. 주인공 ‘레너드’는 단기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10~20분마다 기억이 리셋되기 때문에,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기며 살아간다. 나는 이 영화를 내 인생 원탑 영화로 꼽는다. 백투더퓨처의 행운처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메멘토〉의 각본을 내가 써서 영화화하고, “이 영화를 만든 사람”으로 인생을 통째로 갈아치워도 좋을 정도로 말이다.
영화를 틀었던 이유는 명확했다.
레너드는 단기기억상실로 인해 자기가 하려던 목표를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게 딱 내 모습 같았다. 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 달에 한 번, 혹은 일 년에 한 번씩 그 목표를 완전히 잊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말을 보내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무력감에 빠져 아무것도 안하는 주말이 올 때마다, 혹은 올 것 같은 주말마다 〈메멘토〉를 봤다. 서른 번은 넘게 정주행했다. 일종의 나만의 ‘기억 방지 의식’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렇다. 물론 지금의 내가 특정한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완전히 멈춰 선 것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이미 봤던 걸 또 보고, 결과도 남지 않은 하루를 보내는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런데 이번엔 영화를 틀지 않았다. 대신, 과거의 나—메멘토를 보던 그 시절의 나와 오늘의 나를 연결하며 이 글을 쓴다. 영화 대신 글로 남기는 ‘나만의 문신’처럼 말이다.
나는 요즘 영화를 잘 보지 않지만, 이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내가 쓴 문장을 다시 읽으며 히히 웃는 걸 좋아한다. 그게 내겐 가장 확실한 리셋이자 기록이다. 이렇게 쓰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일요일 밤하늘은 이미 캄캄해졌고, 곧 저녁을 먹으면 일요일이 끝나겠지만, 이 글만큼은 남는다. 아니, 남겨야겠다.
나를 견제하거나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도, 결국 나를 끌고 가는 건 나 자신이니까.
이 글이 앞으로 12년 동안은 내게 그런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