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성을 유지하거나 유지하지 못하거나
요즘 들어 항상성이라는 단어가 자주 떠오른다. 늘 같은 수준의 퍼포먼스와 같은 결의 마음가짐을 유지한다는 것. 말로 하면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꽤 피곤한 태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피곤함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사실 나는 항상성이 왜 그렇게 어려운 가치로 취급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며 살아왔다. 기분이 나쁜 날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컨디션이 바닥을 치는 날도 분명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상태가 그대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감정이 얼굴이나 말투에 먼저 나오는 순간이 불편했다. 나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태를 아무 준비 없는 타인에게 먼저 내미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기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루는 유난히 차분하다가 다음 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모습, 평소에는 무던하다가도 특정 순간에 날카로운 말을 툭 던지고 그 말의 여파는 주변에 남긴 채 본인은 금세 잊어버리는 장면들이다. 그런 모습들을 보다 보면 생각은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돌아온다. 나는 왜 이런 변화에 유독 예민한 사람일까. 왜 나는 어느 쪽이 진짜인지보다 왜 이렇게 달라졌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될까.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타인이 기억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감각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하루를 통째로 살아내지만 타인은 나의 하루를 통째로 보지 않는다. 대부분의 관계는 아주 짧은 순간들로만 구성된다. 회의실에서 스친 몇 마디, 엘리베이터 안의 표정 하나, 회식 자리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말투 같은 것들이다. 그 순간에 셔터가 눌리고, 그 장면은 필름처럼 남는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기억할 때 다시 꺼내보는 것은 그날의 맥락이나 컨디션이 아니라 그 순간의 이미지 하나뿐이다.
나는 그 점이 늘 마음에 걸렸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보다 누군가가 우연히 본 내 한 장면이 더 오래 남는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그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설명해야 하는 시간들과 이미 지나간 온도를 다시 맞추려 애쓰는 과정이 생각보다 피곤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순간의 온도가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조절하는 쪽을 택해왔다. 의식적으로 말을 고르고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오늘은 이 정도로만 하자고 스스로에게 선을 긋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종종 마이클 조던의 말을 떠올린다. 로드 매니지먼트가 당연해진 시대에 그는 누군가는 인생에서 단 한 번의 기회로 자신의 경기를 보러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몸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는 한 그 한 순간을 피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단순한 직업 윤리나 책임감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순간의 무게를 알고 있는 사람의 태도처럼 느꼈다. 그날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그 순간의 조던이 전부일 수도 있다는 감각 말이다.
내가 항상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느끼는 감정도 그와 아주 멀지는 않다. 거창하게 말하면 책임감일 수 있고 조금 솔직하게 말하면 타인의 시선을 과하게 의식하는 태도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의심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도 많다. 혹시 나는 너무 남의 눈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닐까. 혹시 항상성이라는 말을 핑계로 내 감정을 과도하게 검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경험 속에는 이 태도를 쉽게 놓아버리기 어려운 장면들이 있다. 예전에 함께 일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늘 묵묵했고 안정적이었으며 팀 안에서 자기 리듬을 유지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큰 기복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결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업무 분배에 대한 불만과 근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당신만 성장하려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이어졌다. 말의 내용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고 어쩌면 언젠가는 나왔어야 할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날의 온도는 너무 높았다.
물이 한순간에 끓어오르면 주변까지 데우듯 그날의 장면은 모두의 마음에 선명하게 남았다. 며칠 뒤 설명과 사과가 이어졌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항상성이 왜 어떤 사람에게는 중요한 문제로 작동하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라기보다 무너지는 순간이 얼마나 크게 남는지를 알고 있는 태도라는 점에서 말이다.
반대로 감정의 변화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혼자 일했고 혼자 리듬을 만들었으며 세상과의 접점은 오직 자신의 상태가 허락할 때만 열렸다. 기분이 내키면 며칠이고 몰입했고 그렇지 않으면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의 변화에 누구도 상처받지 않았고 누구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는 흐르는 물 같았다. 차가워졌다가 뜨거워졌다가 어느 쪽에도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부럽기도 했고 동시에 나는 저렇게는 못 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삶의 구조는 이미 다른 방식으로 굳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을 떠올리다 보면 항상성은 모두에게 요구되는 미덕도 아니고 모두에게 필요한 기준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각자가 가진 마음의 구조가 다를 뿐이다. 어떤 사람은 크게 흔들려도 곧 중심으로 돌아오고 어떤 사람은 작은 파동에도 오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나는 그 파동이 남기는 잔상을 유난히 의식하는 쪽의 사람이다.
그래서 항상성은 나를 억누르는 규율이라기보다는 내가 나로 남아 있기 위해 택한 방식에 가깝다. 어느 날의 기분이 나를 대신 말해버리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오늘도 조금은 의도적으로 온도를 맞춘다. 그것이 옳아서라기보다는 지금의 나에게 가장 편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완성된 정의를 말하려는 글은 아니다. 다만 내가 왜 이런 쪽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해보는 기록에 가깝다. 항상성이라는 말이 앞으로도 내 삶에서 계속 중요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 이 시점의 나는 큰 파동 없이 하루를 넘기는 방식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 정도면, 당분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