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처음 고시에 진입할 때부터 생각했던 게 있다. 첫째는 당연히 ‘합격’. 반드시 합격한다는 마인드는 고시 공부를 함에 있어 기본적으로 새겨야 할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둘째는 다름 아닌 ‘탈출’. 고시는 실패하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필승의 각오를 다지며 앞으로만 가는 것보다는, 탈출 루트를 하나쯤 짜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다. 나는 공기업을 탈출 루트로 정했는데, 고시 시험 과목은 공기업의 그것과 어느 정도 겹쳤기 때문이다. 혹시나 고시에서 떨어질까 봐, 작년에는 공기업 가산점을 받기 위한 자격증도 두 개나 따 놓았다.
그로부터 꼭 3년이 지난 지금, 이제 나는 키를 고시에서 공기업으로 꺾기 시작했다. 물론 2차 시험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큰 실수를 (최소) 세 개나 한 만큼 결과는 사실상 보나 마나였다. 게다가 결과가 나오려면 3개월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시간을 축내며 보낼 수는 없었다.
* '슬럼프' 에피소드 참고
탈출 루트에 따라, 고시를 포기한 나는 이제 공기업 준비에 올인해야 했다.
하지만 꺾인 것은 키만이 아니었다. 나의 멘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꺾였다기보다는 바닥으로 추락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공부는 손에 잡히지 않았고, 헛되이 보내는 시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양심상 매일같이 공기업 채용 플랫폼에 들어갔다. 눈에 보이는 공기업이라면 어디든 지원했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 목숨 걸고 덤벼드는 다른 공기업 취준생들을 제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자소서를 쓰고, 떨어지기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운 좋게 몇 군데는 자소서를 겨우 통과하기도 했지만, 필기시험에서 예외 없이 모두 떨어졌다.
한 번은 왕복 8시간이 넘는 거리를 이동하며 필기시험을 친 적도 있다. 그런데 당일 함께 치른 인성 검사에서 고배를 마셨다. 심지어 인성 검사에서 탈락했다고 내가 친 필기시험 성적조차 공개해주지 않았다. 내가 어디가 부족한지도 알 길 없이 불합격 통보만을 받은 것이다. 정말 그때의 기분이란..
공기업 외에 7급 시험도 준비했다. 7급은 고시와는 전혀 다른 과목도 두 개 정도 준비해야 했고, 나는 완전히 처음부터 공부를 해야 했다. 그렇게 새로운 전공서적을 샀지만, 도저히 펼치고 싶지가 않았다.
공기업이든 7급이든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나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나는 탈출 루트를 열심히 밟는 대신 PC방을 갔다. 평일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본연의 고시 공부도 거의 하지 않았고, 3개월 간 한두 문제 푼 정도였다. 도저히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그날도 영혼 없이 공기업 채용 플랫폼을 보고 있었다. 그런 내 눈에 새로운 공기업(“기술보증기금”) 공고가 들어왔다. 그런데 무언가 달랐다. 우선 필기시험 과목이 다른 공기업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완전히 제로베이스로 새로 공부해야 했다. 그렇다면 공기업만 몇 년째 준비한 다른 취준생보다 내가 불리할 것이 없었다. 하는 일도, 연봉도 괜찮았다. 인터넷에서 기업 평을 찾아보니, 본사 대신 지방 근무를 하며 워라밸을 챙길 수 있다고 했다. 여길 다닌다면, 퇴근하고 나서 고시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았는지, 처음으로 공기업 필기를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면접 준비는 처음이었다. 정보도 자료도 없었고, 준비하는 방법도 몰랐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나는 스터디를 꾸리기로 했다. 다행히 인터넷에서 같은 기술보증기금 면접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같이 서면 스터디룸에서 만나며 면접 준비를 진행했다.
처음 하는 면접 준비는 쉽지 않았다. PT·토론 연습 등 기본적인 면접 준비는 물론이고, 기술보증기금이 하는 일이나 역할 등에 대한 배경지식 공부에도 시간을 쏟아야 했다. 집에서 서면까지 2시간가량 왕복하는 것도 일이었다. 하지만 힘들면 힘들수록, 나는 점점 면접 준비에 몰입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것, 이것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덕분에 세 번째 2차 시험 이후, 공부 습관을 어느 정도는 회복할 수 있었다.
뚜렷하면서도 현실적인 목표가 생겼다. 어느새 고시는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나의 새로운 목표는 기술보증기금에 올해 바로 취업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공부 스케줄은 면접 준비로 가득 찼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