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혹감은 곧 감격과 기쁨으로 바뀌었다. 그 많은 실수에도 대체 어떻게 붙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는, 내가 받은 2차 합격 문자가 진짜라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했다.
하지만 동시에 막막함이 몰려왔다. 아직 면접(3차 시험)이 남아 있었다. 2차에 붙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그동안 면접 준비는 단 하나도 해놓지 않았다. 그리고 면접은 명확한 공부법이 있는 1·2차 시험과는 달랐다. 기출문제도 없을뿐더러, 뭘 대체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은 끝난 게 아니었다. 기뻐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지방에 살았고, 주위에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랬기에 1차 시험과 2차 시험 모두 스터디를 하지 않고, 나 혼자 준비하였다.
그러나 면접은 스터디가 필수였다. 서로 질문을 주고받아야 하며, 피드백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면접 스터디는 빨리 구해야 한다는 합격수기의 조언이 떠올랐다. 스터디는 2차 합격 발표 직후 모집되고, 대부분 당일 중에 마감된다. 그러니 시간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행정고시 수험생 카페 게시판은 면접스터디를 구하는 내용의 글로 쏟아지고 있었다. 나도 그 대행렬에 뛰어들었다. 아, 처음 연락한 스터디는 벌써 마감이었다. 혹여나 스터디를 구하지 못할까 봐 겁이 났고, 다른 스터디에 들어가기 위해 게시글들을 계속 찾아 헤맸다. 다행히 또 다른 스터디를 찾을 수 있었고, 이번에는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나는 행정고시를 준비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과 스터디를 하게 되었다.
잠시 뒤, 작년도 합격자의 면접 특강이 열릴 예정이었다. 아무런 정보가 없던 나에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특강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고, 배가 고픈 줄도 몰랐지만 어쨌든 그전에 저녁을 먹어야 했다. 근처 맘스터치로 가서 햄버거를 먹는데,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흥분감이 온몸을 휩쓸고 있었고, 나는 햄버거를 입에 쑤셔 넣다시피 했다. 이러다가 체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침착하기가 어려웠다.
스터디원들끼리 줌으로 만나 대화했다. 면접 스터디는 서울 신림동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신림동은 고시촌으로,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다. 면접 학원도 위치해 있다. 그동안 줄곧 부산에서만 공부해 온 나도 이번에는 신림동으로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그전에, 오랜만에 학교를 잠시 다녀왔다. 면접 준비 지원금을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노트북으로 한참 면접 자료를 보고 있었다. 옆에 앉은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보다는 공부가 더 중요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눈앞에 엄지척이 나타났다.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앉았던 사람이 지하철 문을 나가고 있었다.
이제 다시 한번 서울에 올라갈 차례였다. 면접은 2차 시험과 전혀 달랐기에, 나는 전공 서적을 챙길 필요가 없었다. 가져갈 짐이라고는, 작년에 합격한 기맥정 실원에게 받은 3차 시험 교재 한 권이 전부였다. 평소 2차 시험을 치를 때면 전공 서적이 가득한 캐리어 2개와 책가방을 맸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캐리어는 딱 1개였고, 몸은 훨씬 가벼웠다. 목적지도 달랐는데, 나는 한양대 근처 숙소 대신 신림동 고시원을 향했다. 한 달간 묵을 곳이었다.
여태껏 세 번의 2차 시험 응시를 위해 서울을 향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네 번째 상경이었다. 다행히도, 네 번째 2차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 아니었다. 바로 마지막 관문인 면접을 통과하기 위해서였다.
아직까지 이 모든 상황을 믿을 수 없던 나는, 2차 합격 통보 문자와 스터디장과 대화한 문자를 보며 현실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살짝 이상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스터디장과 문자한 게 처음이 아니었다. 3년 전 문자를 주고받은 기록이 남아 있었다. 뭐지 하고 내용을 자세히 보았다. 아, 이 사람에게서 계산기를 샀었다.
3년 전, 막 기맥정에 입실했을 때였다. 공학용 계산기를 구입하려고 했고, 마침 수험생 카페에서 그 계산기를 중고로 15만 원에 판매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한창 판매자와 문자를 주고받던 중, 갑자기 중고 치고는 가격이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같은 계산기를 11~12만 원에 판매했던 과거 글도 있었다. 나는 가격을 깎아줄 수 없냐고 물었다. 판매자는 그 계산기가 최신임을 말하며 난색을 표하다가, 결국 14만 원으로 낮춰주기로 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즈음 나는 워낙 중고거래에 대한 악명을 많이 들은 터였다. 판매자는 계산기가 최신이라 하지만, 그 말을 무턱대고 믿기는 어려웠다. 나는 계산기의 구입 날짜가 적힌 영수증을 요구하였다. 이에 상대방은 영수증은 없으며, 불안하면 거래를 중지해도 된다고 회신하였다. 그 정도면 믿어보자는 생각에 거래를 계속하였다. 판매자는 계산기 충전기도 따로 구입하여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 계산기는 이후 한 번도 고장난 적이 없었다.
그로부터 1년 정도가 지난 어느 날, 나는 문득 그냥 그 사람에게 깎은 1만 원을 돌려줄까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했나?’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1년 만에 연락해서 돌려주는 것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실제 연락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제발 상대방이 그 문자 기록을 지웠기를 바랬다.
다음날, 우리는 신림동의 한 골목에서 만났다. 스터디 자체가 처음인 탓에, 이렇게 모르는 사람끼리 모이는 자리가 조금 어색했다. 우리는 모두 6명이었고, 마침내 다 모인 뒤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저는 기계 직렬 OOO이라 합니다”
내가 소개를 마치자마자 스터디장이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앗, OO님인가요? 저 OO님 계신 거 보고 너무 반가운 거예요~”
아.. 역시 스터디장도 문자를 지우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3년 전 있었던 ‘계산기 사건’을 다른 스터디원들과 공유하였다.
“아니, 저한테 갑자기 네고를 해달라는 거예요! 그 계산기 진짜 거의 새 거였는데..”
세상 정말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뭔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덕분에 첫 만남의 어색함은 금방 풀렸고, 그렇게 우리는 웃으며 근처 피자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때 믿지 못했던 거래 상대방이 이제는 같은 배를 탄 스터디원이 되었다.
자리가 좁아서 셋셋 나눠 앉으며,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왜 행정고시를 준비하게 되었는지, 학교는 어딘지, 2차 시험에 합격할 거라고 예상은 했는지.. 기맥정 실원 이외에 행정고시 준비생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이 상황 자체가 신기하였다.
곧이어 피자와 파스타가 나왔다. 날씨는 밝았고, 음식은 맛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모두 2차 시험 합격자였다. 그래서인지 분위기는 밝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도 들었다. 내가 정말 이런 곳에 있어도 되는지, 이런 걸 먹어도 되는지. 뭐, 내돈내산이지만.
그렇게 식사를 마친 우리는 앞으로 면접 준비 방법, 만나는 주기 등에 대해 개략적으로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고시원을 향하는 내 발걸음은 가벼우면서도, 뭔가 전혀 딴 세상에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은 단 3일 동안 일어났다. 지금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