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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카 Braka Feb 17. 2021

난생처음 중국어를 배우다

나의 학교, 대안학교에 대하여(4)


학교에 입학하겠다고 다짐했던 순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한가지 조건이 있었다.


'3개월의 중국 연수'


내가 중국어를 배울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 드라마는 물론 영화도 제대로 본 적도 없었으니, 중국에 대해서는 초등학생 때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들을 접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한국을 떠나 오랜 시간 동안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학교 합격여부를 확인하고 나서 얼마 뒤에 학교 중국어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중등과정을 학교에서 이수한 친구들은 이미 중국어 기본과정을 마쳤으니, 신입생들은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기초 중국어를 공부하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나는 난생처음으로 중국어를 배웠다. 


영어를 제외하고 다른 언어를 배운 게 처음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첫 시간에 중국어로 인사하기, 내 이름 말하기 밖에 안 배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자체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내가 중국어를 배우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 유난히 신기해하는 이유는 내가 영어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다. 내 또래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그렇듯이, 나도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웠다. 초등학교까지는 단어나 문법이 어렵지 않기에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었지만, 본격적인 문법공부를 시작하는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잘 따라가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느끼는 흥미에 따라 공부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정하던 때라 문법으로 재미없어진 영어는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려났다. 영어공부를 소홀히 하면서 나는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가 중국어를 좋아하다니. 

나에게는 나름 큰 이슈였다.




중국 연수는 고등학교 1학년 6월에 떠나기로 되어있었다. 그렇기에 입학하고 연수를 떠나기까지 나에게는 3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연수를 떠나기 전 그 3개월 동안 나는 자습시간 1,2타임 때로는 3타임까지 모조리 중국어 과제를 위해서 바쳤다. 한자를 외우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발음이나 성조까지 신경 쓰려니 시간을 안 들이려야 안 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중국에 도착했을 때는 말그대로 멘붕이었다. 첫날 중국 선생님을 만나서 말씀하시는데 정말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한 시간은 뭐가되나.. 막막한 마음만 가득했던 것 같다.


그래도 다행히 1-2주 정도가 지나자 선생님의 말씀 정도는 눈치껏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중국 학교에서 하루 종일 배우는 게 중국어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밖에 없으니 실력이 빠르게 느는 것은 당연했다. 또 중국에서 밥을 먹고 살아남기 위해선 어떻게든 중국어를 빨리 배우는 것이 관건이었다. 매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을 찾아가서 전자사전을 두들기며 서투르게 대화를 시도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저 중국인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는 것이 재미있어서 그랬던 것인데, 그때 물어보고 대화했던 것들이 내가 중국어를 공부하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중국어를 배우는 것을 재미있어하다 보니 갈수록 선생님도 좋게 봐주셨고, 중국어 시험 점수도 높아졌다. 솔직히 처음이었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언어가 늘 수 있고 흥미를 느낄 수 있다는 걸 중국어 배우면서 처음 깨달았다. 알고 보니 나는 원래 언어 배우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갈수록 눈에 띄게 떨어지는 영어 점수에 그저 마음이 떠났던 거였다. 내가 열심히 하면 영어도 언젠가 분명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을 그때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배운 그 3개월이라는 시간이 참 감사하다. 그때 언어의 즐거움을 깨닫지 못했다면, 지금 내가 외국 대학으로 진학할 시도나 할 수 있었을까? 그건 나도 장담할 수 없다. 




성적과는 별개로 내 심리적 부담감은 상당했다. 

신입으로 들어와 중국어를 처음 배우던 입장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하게도 가장 낮은 반인 D반에 속하게 되었다. 내가 D반이라는 사실에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다. A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면 힘들다는 이야기를 절대 먼저 꺼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가장 낮은 반에 소속되어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니 어느 반에 있던 그 반에서 최선을 다하면 나한테 손해 될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이 바뀌고 나서야 반으로 인해 얻었던 자격지심은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큰 시험 하나가 남아 있었다. 바로 HSK, 중국어 능력 시험이었다. 마침 또 시험 당일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3일 전, 내 생일이었다.


중국 연수의 중간 점을 찍어주는 연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사실 연변 여행부터 시작해서 딱 그 기간에 슬럼프가 왔다. 수업하기도 싫고, 공부하기는 더더 싫고, 자꾸 몸이 아프고 시도 때도 없이 이유 불문하고 눈물이 났다. 그저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내 옆에 나와 비슷한 상황인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신입인 탓에 마음 놓고 의지할 사람이 없었는데, 중국 연수를 떠나면서 부쩍 친해진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우리는 밤에 잘 때 빼고 모든 시간을 붙어 다녔다. 밥도 같이 먹고, 운동도 같이하고, 자유시간에도 같이 나가 놀았다. 심지어 연변 여행에서도 둘이 동시에 아프기 시작해서 겨우 서로를 의지하며 견뎠다. 즐거울 때나 힘들 때 함께 내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기에, 감정이 속으로 곪지 않고 빨리 슬럼프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시험을 준비하며 전보다 더 많은 단어를 외우고 문제를 풀었다. 나름 잘 버티고 있었지만, 힘들었던 것을 뽑아보자면 생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도 마음껏 신나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시험 전 주 마지막 모의고사를 완전히 망쳐 버렸다. 전 날 너무 늦게 잔 탓이었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의시험 내내 실컷 졸았다. 담임 선생님도 내 점수를 보시고는 깜짝 놀라셨다. 평소에 열심히 준비해 왔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선생님의 위로에도 점수로 인한 충격은 쉽게 사그라 들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자격증을 따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에 막판 스퍼트를 올렸다.

그렇게 시험 당일이 되었다.


그날이 일요일이었는데, 평소 같으면 곱게 차려입고 교회에 갔을 것이다. 시험 당일날에는 곱게 꾸미는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안경에 마스크를 끼고 단어장을 손에 쥔 채 시험장으로 향했다. 그런 와중에도 몇몇 친구들은 전날 공부하느라 늦게 자서 잠긴 목소리로 생일 축하한다고 나에게 말해 줬던 기억이 난다.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사히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본시험에선 졸지 않았다.




그렇게 무사히 나는 중국 연수는 마무리되었다. 다행히 HSK는 합격이었고, 예상에는 없던 중국어 우수상까지 받았다. 


막연히 타지에서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에 중국 연수를 기대했었지만, 중국 연수는 나에게 공부에 대한 흥미를 알려주었다. 또한, 나도 도전하면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경험했던 시간이었다.


어떤 경험이든 무의미한 경험은 없다. 그 경험의 끝이 처참했던, 해피엔딩이었던 분명히 배우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 배움을 얻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해서 도전할 것 같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어떤 경험을 하기 될지 전에는 몰랐던 것처럼, 앞으로의 미래도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더 기대되고 설레는 것 같다.


상하이 여행 중 보았던 예쁜 디즈니 성. 생각보다 크기는 작았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찡짱로스. 처음 중국에 갔을 때 입맛이 없어서 매 끼를 수박으로만 때운 적도 있었다.


나와 내 친구의 최애 학교 식당 메뉴였던 토마토 달걀 면. 약간 시큼하고 짭짤한 맛이 매력있었다.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798 예술거리가 있었다.


핸드폰 없이 생활했기에, 혹시나 길을 잃을까 봐 이렇게 손으로 도착역을 가리킨 사진을 항상 찍어뒀다.


천안문.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결국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중국 연수 이수장을 받던 사진. 한국 간다는 생각에 신나서 날아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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