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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은 아파도 계속 춤추고 싶어

by 브라카 Braka

초등학교 1학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디션을 봤다.


오디션이라고 하면 엄청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교회 율동팀을 들어가기 위한 오디션이었다.

당시 나는 꽤 간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교회 성탄절 행사 때 축하공연을 보다가 7살이었던 나는 초등학생 언니 오빠들이 무대에서 즐겁게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이 멋있어 보였다. 그때 이후로 나는 초등학생이 되면 꼭 율동팀에 들어가겠노라고 다짐했다.


오디션에는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략 15명쯤? 생애 첫 오디션이어서 그랬는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친구들과 학부모님께서 보고 계셔서 그랬는지 나는 많이 떨렸다. 벌써 오래전 일이라 조각조각 남아있는 기억을 모아서 떠올려보았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오디션 직전의 엄마의 한마디였다.


"진짜 오디션에 붙고 싶다면 마지막에 한 곡 더 추겠다고 말씀드려."


당시에는 엄마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진 시간에 내가 한곡을 더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민망하게 느껴졌다. 그때도 지금도 민망하거나 부끄러운 상황은 딱 싫어하는 나는 오디션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엄마랑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기분이 뚱한 채로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모두의 차례가 끝나고 나는 입이 간질간질했다. 분명 엄마께는 절대 안 할 거라고 우겼지만 율동팀에 들어가고 싶었던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간절했기 때문이다. 한창 망설이다가 율동팀 담당 선생님께서 오디션을 마무리하려 하시는 모습을 보고 에라 모르겠다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저 한곡 더 춰도 될까요?"


망설였던 나와는 다르게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허락하셨고 다른 몇 명의 친구들도 함께 한곡을 더 추고 오디션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마지막 그 곡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다행히 율동팀에 합격하게 되었다. 엄마의 파격적인 제안은 어린 나에게 너무 낯설었지만, 내가 손을 들던 때의 두려움과 망설임, 그리고 두려움을 이겨낸 이후에 맛본 짜릿함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 느꼈던 짜릿함은 내가 이후로 계속해서 춤을 추게 했던 계기가 되었다.




일 학년부터 육 학년까지 율동팀에서 활동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경험했다.

먼저 나는 진짜 춤을 출수 있게 되었다. 율동팀을 처음 들어갔을 때 나는 솔직히 몸치에 훨씬 가까운 몸이었다. 춤을 출 때 손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개구리처럼 쫙 피고 있는 나를 보며 엄마가 손을 오므리라고 자주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율동팀 선생님께도 많이 혼났다. 나도 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내 몸이 원망스러운 적도 많았다. 그러나 꾸준한 연습과 노력이 쌓일수록 그와 비례하여 내 실력도 점차 향상되었다.


율동팀을 하면서 춤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도 많이 배웠던 것 같다. 오랜 시간동안 한 그룹 안에서 같이 연습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가까워졌다. 남녀 구분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놀았던 그때의 기억이 나에게는 지금까지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처음에는 어린 마음에 나를 다그치는 선생님이 무섭고 어려웠지만, 그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학년이 되고 난 후에는 나보다 어린 친구들도 챙겨야 하는 상황이 자주 생겨서 팀에 대한 책임감 또한 자연스럽게 기르게 된 것 같다. 무엇보다 무대에 대한 공포감이 없어졌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 앞에 나가서 율동을 하고 찬양을 하는 경험이 나를 계속 단련시켰던 것 같다. 그래서 학교에서 발표를 하거나 대회에 나갈 때에 물론 떨렸지만 그 자리를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게 되었다. 되리어 나는 그 긴장감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율동팀을 하면서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 대부분이지만 사실 힘든 부분도 있었다. 한창 성장판이 열릴시기에 때로는 높이 뛰거나 주저앉는 춤을 추다 보니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갔다. 당시에는 단순히 멍이 크게 들었네 하며 연습을 열심히 했다는 마음에 뿌듯했지만 그때 다친 무릎은 지금까지도 후유증으로 남아있다. 특히 중학생 때는 오래 의자에 앉아있으면 무릎이 시려워서 장시간 동안 앉아있어야 하는 수업이나 강의를 들을 때 곤욕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춤추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에 학교 댄스부에 들어갔다. 사실 이때의 기억은 지금 나에게 예쁘지만은 않은 추억이다. 중학생의 나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었고, 내 옆에 있던 친구들과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마냥 댄스팀 언니들이 어려웠다. 나는 평생을 오빠와 함께 살았고, 그런 나에게 언니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다가가는 것은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다. 팀 언니들이 어렵게 느껴지니 당연히 춤추는 것에는 자신감이 없었고 댄스팀의 틀에 나를 억지로 끼워넣기 바빴다. 짧은 옷에 나를 맞추기 위해서 처음으로 다이어트를 하고 진한 무대 화장도 했다. 당시 나는 춤을 추는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벅차면서도 두려웠다. 그래도 마냥 무대에 설 수 있고, 그 무대에서 춤을 추는 것이 좋고 익숙하기에 그만둘 수 없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사실 춤을 출 기회가 그리 많진 않았다. 그래도 매년 학교에서 열리는 축제가 되면 반 전체가 함께 하는 워십제에 의무적으로 참여했다. 어렸을 때부터 춤을 췄기에 남들보다 춤에 익숙하여 리드하는 자리을 자주 맡았다. 역시 친구들을 리드해야 하는 자리는 쉽지 않았다. 내가 먼저 춤을 따고, 연습시간에 친구들을 모으고. 친구들에게 가르쳐주는 과정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그래도 힘든 연습 시간을 지나고 나면 친구들과 서로 격려하고 좋은 무대를 만들어냈을 때의 성취감이 있기에 포기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춤을 추기 시작한 8살부터 지금, 21살까지 굳이 따져본다면 나는 자그마치 13년을 춤을 췄다. 무엇이든 10년을 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고 아빠가 항상 나에게 말씀하셨다. 비록 나는 춤의 전문가가 되진 않았지만, 내가 어린 시절 율동팀에 있을 때 나를 열심히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처럼, 같은 율동팀에서 이제는 내가 선생님으로서 친구들을 가르쳐 주는 입장이 되었다. 배우던 입장에서 가르쳐 주는 입장이 되니 가끔 기분이 오묘하다. 비록 코로나로 내가 친구들에게 선생님으로서 해줄 수 있는 역할은 한정적이지만, 내가 어린 시절 선생님께 받았던 것처럼 친구들에게 베풀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행복하다.


그렇다면 춤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춤은 내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나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춤을 추면서 알게 된 것은 춤이 단순히 리듬에 맞춰서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담는다면 보는 사람에게도 그 뜻이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춤을 전공하지도, 더 이상 전문적으로 배우지도 않지만 앞으로도 나에게 춤을 출 기회가 생긴다면 기쁜 마음으로 임할 것이다. 무릎은 조금 아프더라도 나를 표현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인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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