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그리고 민족 · 국가 정체성의 혼란
나는 자라면서 내가 한국인임을 의심 해본 적이 없다.
아니, 그런 의심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나는 한국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눈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도 온통 한국인인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물론 크면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또는 해외여행에서 나와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것도 순간이었기에 그들을 보며 나의 '한국인'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거나 깊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는 내가 미국으로 유학 오고 난 이후 완전히 변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한국인은 소수였고 이외에 너무나 많은 인종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경험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왔던 경험과는 달랐다. 어디에 가던 나의 출신 혹은 국적을 밝히는 것이 당연했고,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나와 다른 인종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지하고 있어야 했다. 너무나 다양한 인종과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오히려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한국에서 생활할 때 보다 더 생생하게 느끼게 된 것 같다.
미국에 오고 난 후 나의 이러한 민족 정체성(ethnic identity) 혹은 국가 정체성 (national identity)을 더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과 나 사이의 다름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나와 겉모습이 비슷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나와 전혀 다르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깨닫게 된 것이다.
감사하게도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나름 특권이다. 누군가에게 내가 한국인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 대체로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80-90년대에 할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생활했던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에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모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물론 아직도 한국인이라고 대답하면 South or North?라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케이팝과 같은 대중문화의 발전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정적인 관심을 보인다. 최근에 사귄 친구들 중에서는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친구들도 꽤 많아서 놀랐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당연한 나와는 달리, 누군가에게는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 꽤나 복잡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교포, 예를 들면 한국계 미국인이나 한국계 일본인 등 한국인이라는 인종으로 외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처음 한국에서 외국으로 건너간 1세대 교포는 그들을 '한국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그들의 후손인 2세대 3세대에게 이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들의 겉모습은 한국인이지만 그들 중 대다수는 한국에 대한 기억이 적거나 태어나 한 번도 한국땅을 밟아 본 적 없는 경우도 있다. 또한 당연하게도 그들이 쓰는 제1 언어는 한국어가 아닌 그들이 살아가는 나라의 언어이다.
유튜브 쇼츠를 통해 이 영상을 한 번쯤 본 적 있을 것이다.
M: "Where are you from? Your English is perfect." 어디 출신이세요? 당신 영어가 완벽하네요.
W: "San Diego. We speak English there." 샌디에이고요. 우리는 그곳에서 영어를 사용하죠.
...
M: "No, where are your people from?" 아니, 당신 '민족'은 어디에서 왔냐고요.
W: "Well, my great-grandmother is from Soul." 뭐, 제 증조할머니는 서울 분이에요.
M: "Korean. I knew it!" 한국인이죠. 이미 알고 있었어요!
- YouTube 영상, "What Kind of Asian are You?"
위 예시는 아시안계 미국인들이 일상에서 흔히 겪는 상황을 보여준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린 미국이 그들의 모국이라고 말하기 전까지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겉모습(동양인)만 보고 그들이 미국인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이러한 반복된 상황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제는 이러한 이야기가 미국 이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탈북자, 결혼 이민자,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 등 점점 한국에도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들의 자녀인 2,3세대들이 자라나고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단일 민족으로 살아온 한국이 세계화로 인한 변화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형태의 가정과 그들의 자녀들의 정착을 위해 연구하는 노력이 꼭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