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에게 명절은 피하고 싶은 숙제 같은 날이었다. 한 해에 두 번 만나는 할머니와 친척어른들은 남처럼 어렵기만 했다. 가뜩이나 할머니 댁이 낯설어 서먹하기만 한데 진한 부산 사투리는 또 어찌나 알아듣기 어려운지. 일하시느라 바빠 나를 봐주지 못하는 엄마가 야속하기도 했다. 할머니 댁에서 지내는 며칠은 나에게 마치 낯선 외계별에 떨어져 지내는 한 달 같은 느낌이었다.
말수가 적고 수줍었던 어린 나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게 어려웠다. 걸핏하면 큰소리로 또박또박 얘기하라는 훈계를 들었는데 가뜩이나 타고난 목소리도 작은 나에게는 그게 그렇게도 어려웠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엄마가 나를 웅변학원에 보내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내 모습이 말이다.
그런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내야 했다. 승무원이 되어 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나는 동료들과 섞여 일해야 했고, 이런저런 불만을 가진 손님과도 마주해야 했다. 미소 지은 얼굴로 매뉴얼을 지키고 친절한 말투로 응대했지만 속마음까지 가까워지기는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결혼 후엔 또 다른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효자인 착한 남편이었지만 그의 가족들에게 다가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감정보다는 관계와 분위기가 먼저일 때가 많았다. 그 가운데 조용히 참고 웃고 있는 나를 볼 땐 나 자신이 저만치 멀어져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아이를 키우며 만나게 되는 엄마들 사이에서도 은근한 경쟁과 선 넘는 말들에 마음이 힘들 때가 많았다. 일하는 동안 아이를 맡겼던 도우미 이모님들 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일이라는 이유로, 또는 어른이라는 이유로 내 감정을 모른 체하고 꾹 눌러야 했던 수많은 순간들에 나는 자주 나를 잃어가곤 했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 가운데서도 나는 나름의 방법으로 사람들과 섞여 나갔고 관계를 지켜내려 애쓰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꾹 눌러 담아두고 하지 못했고 때론 눈치를 보며 내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했다. 하지만 속으로 수없이 고민하고 가끔은 용기를 내어 말하기도 하며 나를, 내 마음을 잃지 않으려 버텨온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제 그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꺼내 보려고 한다. 그 시절 많이 서툴고 조용했지만 매 순간 진심이었던 나를, 관계 속에서 꿋꿋이 내 모습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내 마음을 기억해 보려 한다.
이 글은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선뜻 다가가지 못했던 나에 대한 기록이자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천천히 내 자리를 찾아가는 내향적인 엄마, 아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고백이다.
비슷한 마음으로 이 글을 만나게 되신 당신이라면, 나의 서툰 글이 따듯하고 조용한 한 조각 위로가 되길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