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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자객 Jan 12. 2019

  <벽지 그림 유감ㅡ 그깟 유명세가 뭐라고!>

거지 눈엔 밥만 보이고, 개 눈에는 똥만 보이고, 내 눈엔 어딜 가나 그림만 보인다. 왕십리역 근처에 무학식당이란 데가 있다. 밥집 겸 술집인데 이름이 촌스러울 뿐더러 내부시설 또한 칠팔십년대 영화의 배경으로 딱 어울릴 만큼 형편없이 낡고 허름하다. 우리 모임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예전 판소리 모임 사람들이 사부님을 모시고 일년에 한번 신년모임을 하는 곳이다. 이 넓은 서울 천지에서 목청껏 소리하며, 북치고 장구치고 놀 수 있는 데가 이곳 말고는 없다.


올해는 주선자가 오지랖이 넓어서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을 잔뜩 데려왔다. 천성이 수줍음이 많아서 낯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질 못한다.  개밥의 도토리처럼 겉돌고 있을 때 문득 벽지의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남들이야 놀든 말든 나는 그림에 시선을 두며 감상에 젖는다.


도대체 누구였을까? 찢어진 벽지를 저렇듯 멋드러진 그림으로 잘 이어붙인 사람은ᆢ? 이 집의 딸이었을까? 예술을 하는 단골이었을까? 아니다. 혹시 한쪽 다리를 약간 저는 듯한 저 늙수그레한 주인 아줌마가 소녀시절의 감성을 잃지 않고 손수 작업한 것은 아닐까? 혼자 온갖 상상을 한다. 사진을 찍고 싶은데 하필이면 초면인 사람이 그림 벽지 앞에 앉아 있다. 덩치도 산 만하다. 조금만 비켜달라 하고 싶은데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아 혼자 속앓이를 하는 중에 마침 그가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찍는 데 성공했다.


그림을 사진에 담은 것은 단지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마약환자처럼 그림에 중독되어 작업에 열중하다가도 붓을 놓고 가끔 생각에 잠기곤 한다. 이 서푼어치도 안되는 그림솜씨는 대체 이 세상에 무슨 쓸모가 있을까. 배고픈 이들에게 밥이 되어줄 수도 없고, 아픈 이들에게 약이 되어줄 수도 없고, 밤늦게 일 끝내고 돌아가는 알바생의 고단한 눈꺼풀에 잠이 되어줄 수도 없다.


그러나 저 벽지 그림은 어떤가. 무슨 요란한 기교도 없고, 기법도 없고, 투박하고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생활에 쓸모가 되는 얼마나 근사한 작품인가! 내 눈에는 미술관의 그 어떤 유명한 작품보다 더 훌륭하고 아름답다.


유명해지면 전시장에 똥을 싸도 화제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유명세를 치르는 화가였다면 주인의 양해를 얻어 저 벽지를 오려다 액자를 하고 내 작품으로 전시장에 걸고 싶다. 그림이 팔리면 그 돈으로 새로 도배를 해주면 될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전시 스토리인가! 전시 아이템이 아무리 무궁무진해도 이를 실현할 유명세가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이런 반문이 가능하다. 벽지를 떼어서 전시장에 걸었다면 그게 네 작품이냐고? 충분히 던져볼 만한 질문이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은 제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발견해내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가져다 전시장에 놓고 <샘>이라  명명한 것은 도대체 누구의 작품일까? 뒤샹의 작품일까, 변기를 제작한 노동자의 작품일까, 변기를 만든 공장 소유자의 작품일까? 나도 답을 잘 모르겠으니 각자 알아서 판단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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